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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Nov 13. 2023

스위스를 향해

형식과 내용 그 사이 속에서

회수(淮水) 남쪽의 귤나무를 회수 북쪽에 옮겨 심으면 탱자나무가 되듯, 사람 또한 자란 환경에 따라 선해지기도 하고 악해지기도 한다. 이는 비단 동식물과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 환경에 따라 영향받는 사람들이 운용하는 제도(institution)도 이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분명 국제(inter-national) 단위에서의 성문화된 제도는 기성(旣成) 체제의 정당성을 강화시켜 주거나, 유사한 체제들 간 유대를 향상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나아가 경제와 안보를 목적으로도 연합할 수 있다. 하지만, 체제와 제도는 엄연히 일련의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생리(生利) 속 논리체계(algorithm)를 성문화한 것에 가깝다.

외면의 주물(鑄物)은 시간과 경우에 따라 언제든 변형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역할의 중추에는 국가주도의 하향식(Top-down) 접근도 존재하겠지만, 상향식(Bottom-up) 접근 또한 그 변화를 촉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숨 쉬듯 당연히 여기는 민주주의(demokratia)라 쓰는 단어는 ‘수리수리 마하수리(修理修理 摩訶修理)’처럼 외치자마자 이뤄지는 ‘마법주문’이 아닌, 오랜 시간 유럽의 언어에서 활용되어 온 ‘역사적 용어’에 가깝다.

실제 영화의 촬영지는 잘츠부르크(Salzburg)이다.

다시 말해, 명확한 실체를 갖도록 전문가들이 엄격하고 정확한 합의를 거쳐 자격요건을 제시한 객관적 과학용어가 아닌, 오랜 시간을 거쳐 궂은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어 온 복잡한 개념이다. 설사 객관적 과학용어로 민주주의가 규정될 수 있을지라도,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역설했듯, 이상적으로 순수한 민주주의가 오롯이 실현될 수 있는 장소는 스위스의 변방 시골처럼 절해고도(絶海孤島)와 같은 지역에서 가능할 것이다.

이를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같은 단어일지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일련의 패턴을 지닐 수 있지만, 파고들어가면 그 활용은 상당히 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형식상 가장 선진화된 민주주의 헌법으로 평가받던 바이마르 헌법을 운용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민주적으로” 부상한 나치당에 의해 무너졌고, 근래의 경우, 오늘날까지 대통령직을 맡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이 처음 당선된 2000년 3월의 대통령 선거는 당시 서방(특히 미국)으로부터 “러시아 민주주의를 위한 승리”라고 평가받았다.

반면, ‘미국 헌법의 아버지’인 제임스 매디슨이 반(反) 연방주의자들에게 제헌헌법 인준을 호소하기 위해 집필한 연방주의자 논고(Federalist Paper)는, 오늘날 미국의 헌법의 내용을 독해하는 데 있어 제1의 가이드라인으로 평가받으며 미국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있다고 인정받는다.

랑스(Reims)에서 만난 독일 총리(좌)와 프랑스 대통령(우)

이와 유사하게 권위주의 체제들의 제도 단위에서의 안티-테제(anti-thesis)로 꼽히는 유럽연합(EU)은, 형식적 측면에서 1952년 유럽 석탄 철강 경제공동체(ECSC)의 창설이 기점일지라도, 내용적 측면에서의 실질적 시작점은 1962년 독일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 총리와 프랑스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이 샤를마뉴(Charlemagne)의 대관식이 거행됐던 랑스(Reims)에서 만나 떠난 형제(독일)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음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한 시점부터 본격화됐다.

물론, 미국도 엄연히 이식된 헌법과 함께 탄생한 국가이기에, 근래에 올수록 형식이라는 외연에 미처 전달되지 못한 내용상의 정수(soma)의 소실로 그 기능상의 구멍을 드러내고 있다. (유럽연합 또한 이러한 비판점에서 비켜나가기 어렵다)

여지껏 개척자정신(frontierism)과 함께 자기애(self-love)에 기반한 공동체의식으로 다져진 사회적 습속(habit of heart)이 그 허점을 매워왔다. 한편, ‘민주주의 실험장’이던 미국의 민주주의 가드레일은 근래로 올수록 헐거워지고, 위기는 트럼프의 부상과 함께 명시적으로 분출되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도 강조하듯, 기능상의 허점은 통시적으로 제도적 자제와 상호관용이라는 묵시적 규범을 통해 매워왔다. 하지만 1965년 이후로 시작된 정당 재편과 함께, 유권자 집단 역시 이념을 기준으로 재편되면서 이념이 곧 정당의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이 결과 민주당 내 보수주의 인사, 그리고 공화당 내 진보주의 인사의 소멸은 진행 중이고, 유권자 집단 역시 이념을 기준으로 재편돼 이념이 곧 정당의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상대 당 인사보다 정당 내 동료와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게 되면서, 정당 간 협력은 크게 위축돼 정당노선에 따라 표결에 임하게 됐다. 이는 정당 간 공통분모의 소멸과 편향성의 동원(mobilization of bias)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사무엘 스마일스(Samuel Smiles)의 초상화

이념적 양극화와 같은 일련의 사회적 이슈는 정치 개혁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리고 제도가 변할지라도, 개인이 즉각적으로 변화를 체감될 정도로 개인의 삶을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사무엘 스마일스(Samuel Smiles)의 <자조론(Self-Help)>에서 강조하듯) 개인 스스로의 향상이 무엇보다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사담이지만 <자조론>은 출판 당시 영국에서 베스트셀러였다.)

사적 존재를 넘어, 공적 임무를 다해야 하며, 성실하고 자기 삶에 책임지면서도 이타적인 삶을 통해야만, 자제와 상호관용의 규범(달리 말하자면 사회적 습속)을 재-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국가라고 상정하는 추상적 존재 또한 엄연히 개인의 집합으로 만들어진 단위이니 말이다.


미흡한 장문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생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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