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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플래쉬(Whiplash)

평점과 평, 그리고 부연설명과 잡설들

by Belleatriz

위플래쉬(2014)

평점: 9/10

평: 뒤틀린 소크라테스와 리버스(Reverse) 알키비아데스의 만남


(스포일러 있습니다)

여태껏 많은 영화를 봐오지는 않았지만, 봐왔던 영화들 중 철학책을 째로 가져와서 영화에 녹여낸 작품이라는 인상이 든 작품은 <위플래쉬>가 처음인 것 같다.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

영화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 대화록 중 하나인 <알키비아데스 1,2>의 주요 내용을 현대라는 시간의 흐름에 맞게 짜 넣었다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

사담이지만 <알키비아데스 1,2>의 진본 여부는 아직 분분하다. 다만, <알키비아데스 1,2>이 헬레니즘 시기에는 플라톤 텍스트 중에서도 크게 주목받는 대화편 가운데 하나였고, 고대에도 플라톤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텍스트 가운데 위작을 가려내고자 하는 시도가 꾸준히 있어왔다는 점을 미뤄봤을 때, <알키비아데스 1,2>의 진위여부를 쉬이 단언할 수는 없다.

(현재는 논의의 여지를 열어놓으면서도 진본으로 보는 쪽으로 추세가 기울고 있으며, 위작이라고 해도 내용상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과 충분히 일관되게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고대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플라톤 철학의 입문서로 소개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알키비아데스 1,2> 김주일, 정준영 역. 정암학당)

여하튼. "뒤틀린 소크라테스와 리버스 알키비아데스의 만남"이라 평하기 위해서는 알키비아데스가 누구인지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다음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 대화록 <알키비아데스>에서 어떤 대화를 오갔는지 언급한 뒤, <위플래쉬>에서 어떻게 변용되는지 봐야 저 평의 참맛(?)을 음미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육감적 쾌락으로부터 알키비아데스를 끌어내려는> , 장바티스트 르뇨

일키비아데스는 고대 아테네의 위대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친척으로 그에게 후원받았고, 수려한 외모를 가져 성년 이전에는 남성들의, 성년 이후에는 여성들의 마음을 훔쳤다. 뿐만 아니라, 남다른 자부심으로 무장한 채 큰 뜻을 품고 자잘한 일에는 개의치 않아하고, 유능하며, 고결했다.

<The Chariot Race> Alexander von Wagner

실제로 그는 당시 척박하고 돌산이라 말을 키우기 어려운 환경의 아테네에서 우수한 혈통마를 길렀다. 마주(馬主)로써 후원이 개인선전용이라 거만하다는 주위의 비판에 올림픽 전차경기에 직접 출전해 우승하기도 한다.

한편, 영화 속 주인공 앤드류 네이먼(마일스 텔러 扮 이하 앤드류)은 차도남에 엄친아 같은 이미지의 알키비아데스와 다르다. 앤드류는 일류 드러머의 꿈을 안고 뉴욕의 명문 셰이퍼 음악학교에 들어간다.

아테네 최고의 지도자 중 한 명인 페리클레스의 친척인 알키비아데스와 달리, 앤드류의 친척들 중 음악에 조예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자기를 낳자마자 도망쳤고, 고등학교 교육자인 아버지와 함께 둘이서 살아왔다. 그가 음악을 배울 수 있던 방법은 그가 동경했던 전설적인 드러머 버디 리치를 비롯한 연주자들의 연주를 보고 들으며 배우는게 유일했다.

수려하고 언변에 능했던 알키비아데스와 달리, 앤드류는 숫기도 없었고 최고의 스튜디오 밴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을 해야 했다. 자신이 종종 방문하던 영화관 매점 아르바이트생 니콜(멜리사 베노이스트 扮)에게 겨우내 호감을 표하던 앤드류는 어느새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밴드 지휘자 '테런스 플래처(J.K. 시몬스 扮 이하 플래처)'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 그녀와 절연하고 스스로를 더욱더 몰아붙인다.

<Alcibiades being taught by Socrates>, Marcello Bacciarelli

그렇다면 앤드류와 플래처의 관계는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의 관계와 어떻게 다른가? <알키비아데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소년애(愛) 대상이 되는 기간을 갓 벗어나 구애를 받지 않게 된 알키비아데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는 알키비아데스에게 나이 들어가는 육체의 변화 속에서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마음두지 말고, 그(알키비아데스)의 영혼을 사랑해 곁에 남는 사람을 위해 영혼이 최대한 아름다울 수 있도록 분발하기를 촉구한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알키비아데스가 민중의 애인(즉 정치가 [Statesman])이 되어서 다수에 의해 되려 망가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숙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길 제언한다.

다시말해,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상대방을 이기고자 경쟁적으로 논박하는 소피스트의 심리적 동인이 아닌,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자각함으로써 스스로 탐구를 추구하고 궁극적으로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도록 촉구한다. 숙고를 잘하는 것은 지혜를 갖추었다는 뜻이고, 숙고를 잘하게 되면, 자연히 신중함과 절제(혹은 자제)력이 길러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성적인 교제를 요구하던 다수와 달리, 알키비아데스에게 지성적 교제를 촉구한다. 나아가 육안(肉眼)의 반경에 보이는 무리들 중의 으뜸이 되는 것이 아닌, 인식의 지평선 속의 리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걸출한 인물이 되기를 원용한다.

앤드류와 플래처의 관계는 이러한 관계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 설령 앤드류가 알키비아데스처럼 스승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플래처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교육자의 지위에 있을 뿐, 이들의 접근방식은 상이하다.

무지에 대한 자각을 통해 스스로 탐구를 추구하고 궁극적으로 만개하기를 바라던 산파술을 구사하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플래처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룰과 가이드라인을 들이댄다. 이를 어길 시 무자비한 페널티가 부과된다.

일관되게 알키비아데스에게 질문만 던지는 소크라테스와 달리, 플래처는 느낌표만을 던진다. 첫번째곡 <위플래쉬>를 연주할 때 이런 접근법이 나쁘지는 않았다. 속도를 절제시키고 정제된 연주를 위해서였다고 소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속도를 올려야하는(이자 한계를 끌어올리는) 두번째곡 <카라반>은 다르다. 이제 플래처는 묘한 경쟁심리와 편애로 앤드류를 신경증적이게 자극시킨다. 재즈를 좋아하고 즐기던 앤드류는 어느새 자신이 전설적인 밴드 드러머를 키워내지도 되어보지도 못한 플래처의 이상과 혼합 돼버린다.

이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앤드류는 플래처가 상상한 기준에 갇히게 된다.

끝내 앤드류는 플래처에 의해 자신의 최대를 카네기 홀 음반사 관계자들 앞에서 뽑아낸다. 하지만, 앤드류는 이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가이드라인을 따라야만 하게 됐다. 외부의 반응에 수동적으로 자신의 연주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후의 이야기는 열린 결말이지만.

<알키비아데스의 죽음(La mort d'Alcibiade)> 필립 셰리(Philippe Chéry)

알키비아데스의 경우, 아테네의 영광으로 여겨지던 그는 정치적 모략으로 스파르타, 페르시아를 망명하다가 아테네의 부름으로 다시 돌아와 무훈을 쌓지만, 또 한번 추방되어 암살당한다.

그와 대쌍을 이루는 앤드류는 그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될까? 오히려 앤드류는 암살'당한' 알키비아데스와 달리, '스스로' 생을 끊지 않을까..?

사형을 언도받은 소크라테스

"청년들을 부패시켰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언도받은 소크라테스와 달리, 플래처는 명문 음대 교수직에서 내려왔음에도 음악인들의 꿈의 무대인 카네기 홀에서 밴드연주를 지휘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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