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로댕미술관 관람기
로댕, 창조적 천재성을 조각하다.
로댕 미술관에 전시된 발자크는 사진에서 보다시피 한 명이 아니다. '하긴 발자크니까 잘 표현하려면 여러 번 연습했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이 미술관의 로댕의 조각들을 본다면, 로댕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정교하게 조각해놓았다. 실력 부족이 아니라면 왜 '발자크'만큼은 이토록 개성 있고 모호하게 그리고 여러 번 그려낸 것일까.
발자크 동상은 프랑스 문인 협회의 대표로 있던 에밀 졸라의 요청으로 계획되었다. 문학의 대가 발자크가 아직 파리에 없다는 것은 에밀졸라를 비롯한 당시 사람들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발자크 동상 제작은 에밀 졸라가 문인 협회의 대표를 맡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글'이 곧 기념비이긴 하지만 파리에는 작가 동상이 유행처럼 곳곳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볼 때, 에밀 졸라가 발자크 동상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이해가 된다. 발자크가 늘 우리 곁에 살아있기를 바라며 사람들은 모두 두 손 모아 발자크 동상을 기다렸다. 게다가 당대 위대한 조각가 로댕이 만든다니 여간 기대되는 일이 아니었다.
로댕은 발자크의 고향 투렌으로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발자크가 즐겨 입었던 옷까지 걸치고 열정적으로 대작가를 탐구했다. 오랜 시간 연구한 끝에 로댕은 살아있는 듯한 한 명의 위대한 작가보다는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조각으로 영원히 남기고자 결심한다. 로댕에게 '발자크'는 곧 '창조적인 천재성'이었고 이 내면적 가치를 새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로댕의 발자크는 '천재란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언제나 하나의 경악'이라던 시인 릴케의 말처럼 당시 사람들에게 거부당했다. 사실 나도 로댕 미술관을 구경할 때, 극도의 섬세한 조각들을 보며 감탄하다가 발자크를 갑자기 마주친 순간 이 괴상한 조각은 뭐지? 하는 당혹감이 들었다. 1900년대 초반 사람들이 받은 충격과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 파리 Vavin 역에 로댕의 발자크가 있다. 만약 한국의 '박경리'를 로댕의 발자크 버전으로 조각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너무나 파격적으로 느껴진다. 조각가 로댕에게도 사실적 묘사보다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가 표현한 발자크를 미루어보면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참신하고 추상적일지라도 자신에게는 명확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매 순간 다른 나 자신을 발견하는 '멀티 페르소나'의 시대에, 명확한 정체성의 발견은 막연하기만 하다. 내가 쓰는 가면 모두 정체성이라고 하자니, 억지로 꾸민 듯 어색한 것도 있다. 로댕이 발자크의 고향 사람들을 만나고 발자크가 입었던 옷을 걸친 것처럼 적극적인 행동을 하다 보면 나도 세상에 내려앉을 정도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본다. -경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