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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의 시간이 다가온다

연말정산 2

by 루시

결국 해지는 것은 보지 못했다. 아침부터 언제 비가 올지 흐렸고 오후 늦게서야 하늘은 좀 개었지만, 여전히 구름이 많았다. 날씨가 아니더라도 언제부터 가는 해를 아쉬워하며, 12월 31일의 일몰과 1월 1일의 일출을 기념하였는가. 그럴 리 없다. 나는 늘 가는 해와 오는 해에 양다리를 걸쳐 일을 하고 있었거나 힘든 일을 겪고 있어 얼른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거나 아무 생각과 의미 없이 그 시간들을 떠나보냈다. 그렇게 힘들어하던 시간들이 빠르게 흩어져 이제는 그렇게 힘들 것도 그렇게 마음이 무너질 일도 그렇게 아둥바둥할 일도 없다. 그저 늘어가는 주름과 처진 턱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가 무언가를 하지도 못한 채 사라져버린 순간들을 그리워한다.


생각해보니 올해는 바쁘고도 행복한 시절이었다.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으려 사진도 훓어보고 캘린더 앱도 들여다 보며 한 해를 정리해본다. 이내 집안일도 조금씩 정리해본다. 현관에 어지럽게 널부러진 쓰레기들과 음식쓰레기를 내다 버리고, 올해의 마지막 식사를 한 후 정성들여 설거지를 한다. 건조대에 널린 빨래들을 정리하고 아무데나 늘어놓은 옷가지를 가지런히 걸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바꾸어놓은 지 한참이나 되었지만 방구석 한켠에 쌓여있던 이불을 곱게 접어 이불집에 넣는다. 발이 시려 족욕을 하다가 눈길이 가는 타일틈새를 솔로 문지르며 갑자기 청소를 한다. 그리고 올해의 묵은 찌꺼기들과 때들을 씻어내기 위한 샤워를 오래도록 한다. 다분히 미신적인 행위라 할 수도 있지만 길흉화복이란 것이 결국 생활에서 나오는 거라 합리화하면서 가볍고 산뜻한 정월 초하루 아침을 기대하고 있다. 새해 첫날 아침부터 개수대에 그득한 설거지거리와 냄새나고 넘쳐나는 쓰레기, 지저분한 화장실, 발디딜 틈 없는 방바닥, 잔뜩 떡진 머리 이 모든 것의 조합이 나와 우리집이고 싶진 않다. 올해와 마찬가지로 환한 아침을 열며 내 손바닥 정원을 가꾸고 싶고, 시간에 쫓겨도 조바심이 나도 순서를 점검하며 차분해지는 마음도 유지하면서, 내가 생각한대로,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내는, 그런 나이고 싶다.


그러니 나는 여전히 내일을 준비한다. 내일부터의 일주일을 위한 장을 봤고, 식탁 위엔 귤이 상하지 않게 표면을 건조시키도록 널어놓았다. 아직 다 그리지 못한 그림을 계속 그렸으며, 여전히 겨울학기 중인 바이올린 레슨을 받고 왔다. 아직 회사엔 마치지 못한 일들을 남겨놓고 왔으며, 다음 달에 떠날 여행을 위해 묵을 곳을 알아보고 기차표를 예매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 몇시간 남지 않은 새해의 계획을 세워본다. 오늘까지의 올해와 다른 내일의 내년은 이토록 멀고도 가깝다.


시간은 단절되지 않고 물처럼 흐른다. 그 물은 나와, 우리집과, 내가 머무는 시간과 공간을 굽이쳐 기억을 묻히고 자국을 남긴다. 그 자국은 찻잔의 때처럼 지우기 힘들 때도 있고 예상치 못한 차향기를 맡게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머물지 않고 나를 친숙하고도 새로운 어딘가로 데려다 줄 것이다. 그 시간의 옷을 입고 있는 내일의 일출을 기대하겠다.


PS. 내일을 기대하다 보니 어느새 새해가 되었네. 해피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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