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의 루틴을 지키는 일은 ISTJ성향의 사람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계획에 어긋나는 일은 성가실 뿐만 아니라 예상보다 더 소모된 에너지로 피곤함과 함께 버무려진 연속의 사건들을 불러온다. 오늘의 여유 없음도 어쩌면 어제부터의 비일상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발단은 그전부터 일 수도 있겠다. 아침 일찍부터 긴장감으로 근무 시간 내내 눈을 부릅뜨고 있다 보니 처리해야 할 일이 막힌 데서 오는 불편한 마음도 계속 언짢은 상태로 남아있었다. 배가 고팠지만 마침내 비어있는 시간이 생겨 지난주 혈액검사와 엑스레이 초음파를 찍고 난 결과를 들으러 병원을 방문해야 했기에 서둘러 지하철을 탔다. 평일 낮이어도 역시 9호선은 너무나도 붐볐다. 붐비는 지하철은 내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개미지옥이다. 허기에 눈이 뒤집혀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냉장고에 켜켜이 쌓여있던 음식을 덥혔다. 허기가 쉬이 사라지지 않고 이것저것 냉장고를 뒤적거려 간식거리를 더 흡입하고 나니 묵은 노곤함과 함께 잠이 밀려온다. 병원에 가기 전에 딱 30분이 비었다.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꿈도 꾸었는데, 얼굴 한쪽에 쿠션자국이 심하게 남아 마스크를 써야만 할 정도다. 주섬주섬 다시 옷을 갖춰 입고 나서 약속한 시간에 병원에 도착했으나 사람이 많아 기다린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 앉은자리 뒤에 기대어 조금 더 눈을 감았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기에 진료 보는 동안에도 연신 하품을 해댔다. 걱정했던 심각한 질병이 아니라 소염진통제만 잔뜩 처방받아 집에 돌아오니 더 피로가 쌓인 건지, 긴장이 풀린 건지 드러눕고 싶다. 이따가 다시 나가봐야 하니 이불을 덮진 말자.
…
세 시간이나 자버렸다. 한 달을 기다린 독서모임은 날아갔다. 일정이 틀어지니 또 스트레스가 된다. 한 달을 꼬박 공부하며 책을 읽고 머릿속에 남기려 애쓰고, 기록하고 생각했던 일들이 또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순간이다. 스트레스가 되니 점심식사 후 늘어지게 잠을 잤어도 또 배가 고파진다. 또 냉장고를 들여다본다. 주말 동안 먹지 않으면 버릴 음식들이 많으니 양껏 실컷 먹는다. 불룩해진 배를 두드리고 나서 그동안 손대지 못했던 그림을 다시 잡는다. 그림을 두어 시간 그리고 나면 손이 엄청 뻐근하고 뻣뻣한데 이럴 때 쓰라고 받아온 진통제가 한 달 분이나 되니 핑계를 대지 않고 몰두해 본다. 12시가 다 되었고, 만사 귀찮아 샤워는 낼 아침에 해야겠다.
일어나지 못할까 봐 자면서도 긴장해서인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깨어버렸다. 화장실에 다녀와서도 배가 묵직하니 불편하다. 어제 너무 많은 음식을 먹어서인 듯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화장실 다녀오면 잠이 깨는데, 뭔가가 계속 불편하다. 아… 화장지…ㅠㅠ. 가방도 싸놓지 않았고, 샤워도 아직 못해 시간이 살짝 부족하다. 오늘 날씨가 더워 아침식사용 달걀을 가져가면 먹을 데도 없거니와 상할 것이 뻔했으므로 미리 식사를 하고 출발해야 했다. 부랴부랴 씻고, 짐을 싸서 나오려는데 자꾸 빠진 것이 생각나 몇 번을 현관에서 왔다 갔다 들락날락했다. 엘리베이터는 하향 버튼을 누르기 직전 우리 층을 지나쳐버렸다. 올라오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야말로 내 도가니 걱정을 내려놓고 뛰어야 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헐떡이는 것은 잠시지만 지하철을 타고나서 다음 숨을 고르는 게 더 낫지. 그리고 내 무릎 아… 그래, 난 진통제가 있어. 그런데 휴대폰의 티머니가 태그가 안된다. 한 번 삐비빅. 어쩌라고… 또 한 번 삐비빅. 아잉. 난 야속한 눈으로 지하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하철은 냉정하게도 유난히 치익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망연자실 문이 닫히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무릎을 어루만지며 진통제도 먹어야 했다.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는데, 처음부터 늦으면 주말 아침시간은 장담할 수 없다. 지하철의 속도로 마음은 달리고 있으니 아침부터 지친다. 그래도 시간이 얼추 늦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갈아타면 된다. 근데, 방향이 맞나?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갈아타니 목적지의 방향을 헷갈려 반대방향으로 가야 하나? 하고 휴대폰의 지도앱을 켜는데, 이 핸드폰 끝까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벌써 지하철은 도착해 있고, 문이 닫히려고 한다. 전력질주해 닫히고 있는 저 문으로 슬라이딩! 성공이다. 문에 살짝 부딪쳐서 문이 닫히다 잠깐 멈추었는데, 이 차 못 탔으면 난 오늘 일정 완전히 망가진 거다. 아침부터 우당탕탕 정해진 장소에 시간에 맞게 도착하니 그제야 심장박동이 제 속도로 돌아온다. 그러나 여태까지 마음 졸인 만큼의 피로는 적립.
아침부터 또 다른 곳에서 뜀박질을 해댄 친구 덕에 자리에 앉자마자 영접하게 된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잔으로 카페인 수혈에 성공하니 그제야 오늘 머피의 법칙은 종료.
머피의 법칙이란, 일종의 경험법칙으로,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고 갈수록 꼬이기만 하는 경우에 쓴다. 이 용어는 미국 에드워드 공군기지에 근무하던 머피(Edward A. Murphy) 대위에 의해 유래되었는데, 당시 미공군에서는 조종사들에게 전극봉을 이용해 가속된 신체가 갑자기 정지될 때의 신체 상태를 측정하는 급감속 실험을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나중에 조사해 보니 조종사들에게 쓰인 전극봉의 한쪽 끝이 모두 잘못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는 한 기술자가 배선을 제대로 연결하지 않아 생긴 사소한 실수 때문이었다.
전극봉을 설계한 머피는 이를 보고 "어떤 일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그 가운데 한 가지 방법이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면 누군가가 꼭 그 방법을 쓴다"라고 말하였다. 머피의 법칙은 바로 여기서 유래하였다. 그 뒤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꼬이기만 하여 되는 일이 없을 때 흔히 이 말이 사용되면서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이 에드워드 공군기지의 실험은 충분한 안전장치가 있다면 인체는 극심한 충격도 버틸 수 있다는 결과를 보였고, 후에 자동차 안전장치를 의무화하는 결과를 이끌었다. 잘못될 수 있는 일은 아무런 대비가 없다면 결국 잘못되기 마련이라 하지만, 미리 충분한 안전장치가 준비되어 있다면 잘못될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안전장치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돌다리도 두들기며 건너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ISTJ의 안전장치는 계획이며, 시나리오와 예상경로, 시계 그리고 지도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군.
다행히도 오늘의 남은 일정을 모두 무사히 마쳤으므로, 오늘의 결론은 머피의 법칙 종료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결국 샐리의 법칙이 되었다. 그건 아침의 정신없던 사건들을 겪긴 했지만, 운 좋게도 지하철 슬라이딩할 때 다치지 않았고, 그 외 예상을 벗어나는 일은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후 생각했던 대로, 계획했던 대로 차선책까지 대비하고 염두에 두었다가 바로 계획을 수정해 차선을 선택했기 때문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꼬이기만 했던 일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불행의 이유를 고정적이거나 지속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순간은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계획으로 가득 차 있는 내 생활도 언제나 계획만으로 완벽하게 끝나지 않고 굴곡이 생기며, 다이내믹하다. 그러기에 매일이 예상치 못한 안타까움과 불행의 연속, 꼬이는 것들로 버무려진 머피의 법칙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끝맺음이 되는 샐리의 법칙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