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 우린 어른이지만 아직도 마음에 담고 있는 이야기들이 많고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도 누군가에게 쉽게 털어놓을 수는 없는 상황일 때가 많으니까.
우선 그동안 고생 많았다. 잘 견뎌왔고, 잘 버텼어.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하는 일이겠지만 네 잘못으로 일이 이렇게 된 게 아니잖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 그 어떤 것도 삶을 포기하게 할 가치는 없다고도 생각하고. 너와 나 주어진 것 없이 세상에 태어나 이만큼이나 잘 살아온 게 스스로 기특하다고 여기기로 했어. 누구나 나만큼 삶이 고단하고 살아내기 어려운 거라고도 생각하고 있고. 그러니 너도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견뎌주길 바라고 있어. 최악의 상황에 다다르기 전에 일단 숨 고르기 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짧지도 않은 시간 살아오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 내가 하는 일이 나 자신일 때도 있었어. 하지만 모든 일이 내가 생각한 것처럼 되어가지는 않았어. 그러면서 나도 더 힘이 들고 지쳐갔지. 그러면서 과연 꿈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 시간이 흐르면서 꿈이 사라진 걸까? 지금의 자리에 오기 위해서 정말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이 자리에 도달했지만, 계속 질문하게 되었지. 내가 원한 것이 이것이었을까.
그렇게 견디는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지금 이곳에 있어도 다른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어. 지금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만족스럽지 않아서였지.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것도 다른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허락되어서라는 걸 깨달았어. 양눈 옆을 가린 경주마처럼 앞으로만 달려나가기 위해 채찍질당하는 상황은 아니었던 거야. 적어도 내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가는 생각할 수 있는 여지는 있었지. 그리고 다른 곳과 다른 것들을 탐색할 수 있는 시간도 허락되었어. 여전히 나는 무얼 하고 싶은지는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의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에너지는 조금씩 저축하고 있는 중인 거 같아.
그래서 너도 그런 여유를 가지게 되길 바라. 선택의 여지는 늘 없고, 고개를 들어 먼 곳에 잠시 눈을 돌리거나 깊은 숨조차 들이켤 수 없는 곳에 있다면 너를 보호할 수 있는 곳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해. 그게 맞아. 너를 잃어버리고 좀비처럼 살 수는 없어. 너는 너의 삶을 살아야 하니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있어도 괜찮아. 그런다고 너라는 존재가 사라지거나 뭔가 혁명적인 것도 일어나지는 않아. 너는 너의 일을 너무나도 많이 해냈어. 그러다 보니 그것에 익숙해져 있을 뿐이야. 그런데 말이야, 그건 네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잖아. 이제 네가 하고 싶은 무언가가 생길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제 너는 너를 돌보기 시작한 거야.
대신 일상을 지켜주렴. 그간 밀린 잠도 많이 자고,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하고, 밥 먹고, 약 챙겨 먹고, 화장실 가고, 옷 갈아입고, 아이들의 안부를 묻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았으면 해. 그리고 다시 잠자리에 들 때에 오늘 하루도 잘 견뎌내느라 지쳐있어도, 그저 아무 생각없이, 근심 떠올릴 새 없이 또 다시 잠이 들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너의 에너지를 보충하기를 바라.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네가 하고 싶었던 일, 멈추었던 생각을 다시 떠올리게 되기를 바라. 너만의 루틴을 찾고, 너의 몸을 가꾸고, 네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하고 너의 뜻대로 무언가를 시도하게 될 거야. 대신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 너는 너를 지나치게 소모시켜 버렸으니까. 그러니 조바심내거나 불안해 할 필요는 없어. 인생은 쓸데없이 길다는 걸 알고 있잖아. 시간은 아직 우리 편인거 같아.
넌 실패한 게 아니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 긴 무력감의 끝이 어디일진 나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건 권태하고 다른 거 같아. 적어도 네가 무언가는 해내고 싶어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니까. 세상 살아내는 게 쉽지 않지. 그렇지만, 태어나는 걸 원하지 않았어도 내 뜻대로 내 삶을 살고는 싶어. 아둥바둥하며 발버둥치고 있어서 조금 힘들고, 지치고, 때로는 멋쩍고, 부끄럽기도 하고, 누군가와 비교되거나 하찮게 여겨지지만 그래도 나의 의지라고 믿고 싶어.
사랑한다. 나의 유일한 혈육이자 친구. 너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듯, 내가 너에게 의지가 되길 바란다. 네가 있어 고맙고, 자꾸 힘들다고 말해주어 더 고맙다. 안아주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