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박인환(1955)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나는 전쟁을 모르는 세대이다. 그렇지만 전쟁 후의 아무것도 없는 세상만큼 아무것도 없던 시절을 살았다고 여기고 있다. 그 궁핍에 대한 감각과 기억은 여간해선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삶을 지속하는 동안 집요하게 매달리고, 또 강박적으로 의식하면서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여유가 없게 만든다. 그래 여유를 말할 새도 없이, 보통의 감각은커녕, 각박하게 만들지. 그래서인지 상실에 대한 아픔이 더 크게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다. 여름날의 호숫가에서 느껴지는 호젓함과 후끈한 공기, 가을의 공원에 가득한 풍성한 기분은 나뭇잎에 덮여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기가 도는 냉랭한 기운만 느껴진다. 지금은 없는 사람의 빈자리가 더욱 슬프게 남을 뿐이다.
나는 그와는 호젓하고 여유 넘치는 공원을 손을 잡고 유유자적히 걸어본 적이 없다. 언젠가는 같이 하고 싶었지만, 늘 걷기 싫다는 그의 말에 서운할 뿐이었다. 그때는 어떻게 내 마음을 표현하고 주장하고 주고받아야 하는지 잘 몰랐고, 그저 상대가 원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마음에 아쉬움이 늘 남았다. 나는 왜 나의 생각과 마음을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그래서인지 그만두어야겠다 마음먹었을 때 미련이 남지 않았다. 다만 그와 함께 나눈 감각만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그것은 그 사람과의 감정의 교류가 강렬해서였다기 보다 이전의 궁핍하고 가난한 경험에 비해 한꺼번에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의 홍수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가버린 지 오래고 옛날은 기억으로, 내 나이라는 숫자로, 가끔가다 튀어나오는 지난날의 물건들로 남아있다. 그러면서 감정도 무디어지고 흐릿해져 사라질 듯 사라진 듯 무덤덤, 그랬었지. 그랬었구나. 참 어렸네. 이런 생각뿐이다. 이쯤에 다다르면 그 시간의 나는 무엇이 소중한 것이었을까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오늘만을, 지금 이 순간만을 사는 하루살이처럼 영겁의 시간 속 티끌이었다고 여겨진다. 덧없다. 이 만큼을 살았어도 내 몸의 부분 부분이 모두 느껴지지 않고, 지난날의 각질은 모두 벗겨져 나가 지금도 헐벗은 채 거리로 내쫓기듯 배회하는 기분이다. 아무것도 없는 기분은 수치심인가, 가난함인가. 갑자기 내가 불쌍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