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반의 굴레다. 매일 이 시간부터 쳇바퀴를 돌리기 시작한다.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십수 년 전보다 지금이 훨씬 힘들다는 어른의 유난이 늘었다는 점. 아니,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 때는 면도도 하지 않았다. 드문드문 자랐던 수염이 창피했던 열여섯의 나는 유난히 길었던 수염만을 대충 자르곤 했다. 수염이 나는 게 그때는 놀림거리가 되곤 했다. 어쨌든 지금은 당연하게 세수 하고 면도를 한다.
욕실에 두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나무 선반, 그 안에는 욕실용품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 그 선반 위에는 소풍날 아침에 돌돌 말려 쌓여 있는 김밥처럼 수건들이 예쁘게, 나름의 규칙대로 자리했다. 가끔은 가장 밑에 깔린 수건을 꺼내 쓰며 의미 없는 만족감을 느끼곤 한다.
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떼니 물기 뒤의 글씨에 새삼스럽게도 눈이 갔다. 이름 모를 아이의 돌잔치 날짜. 지금이 2025년이니 이 아이는 아마 초등학생이 되었으리라. 누군가의 생일, 개업, 체육대회… 이토록 알록달록한 추억 더미가 또 있을까? 기억에 남기고 싶은 하루를 수건으로 기념하는 일이 꽤 당연하고도 간편한 일이 되었다. 감사와 기념의 의미가 담긴 물건을 이렇게 막 써도 되는 건가 하는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 때는 이미 몇 분은 서둘렀어야 하는 시점이다.
모종의 의미를 떠올린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다. 내가 가져와 그 출처가 분명한 몇 없는 수건들도 있다. 대학생 때 총학생회에서 학생회비를 거두어 만들어 나누어준 기념 수건, 갓난쟁이 시절 나를 곧잘 따랐던 사촌동생 한별이의 첫돌 기념 수건을 쓸 때마다 그날의 한 장면이 곧장 떠오르지는 않는다. 하물며 어디서 난 지도 모르는 것들이라면 더더욱 상관이 없지. 그저 상상이다. 찢어진 영화 티켓과 페스티벌 입장 팔찌, 영화제 팸플과 홍보물, 그리고 선물과 그 선물을 포장했던 포장지까지. 아슬아슬하게 잡히는 의미의 실마리 한 가닥 한 가닥을 붙잡아두는 행위, 즉 작은 일에도 가능한 의미를 부여하는 나라서 겪는 그런 일.
추억이 담긴 어떤 날들이 각각 어떤 색을 띤 채로 툭 떨어져나와 몇 뼘 남짓의 천 조각으로 남는다. 그 천 조각이 저마다의 집에 켜켜이 쌓인다. 그리고 총천연색의 수건을 보며 지난날들을 떠올릴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수건을 꺼내 머리를 털며 생각한다. 어쩌면 한 번 본적도 없는 사람이 자신이 지나온 나날을 괜스레 돌이켜본다는 사실을 저들이 과연 상상이나 할지. 그러는 그들 또한 가끔 누군가를 내심 그렇게 떠올리고 있지는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