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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소리 May 28. 2021

(단편소설) 회색인들의 영토

1. 과거로 던져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과거로 던져졌다. 꿈도 아닌 현실인데 어떤 물리학 법칙이 적용되었는지 몰라도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2021년에서 1991년 2월로 시간 여행을 하고 말았다. 한참을 돌아보니 2층 양옥집의 방 한 칸에 내가 누워 있었다. 80년대 중반부터 전세로 살았던 그 시절의 추억이 급히 소환되었다. 추억은 이제 현실이 된 것이며 내가 알던 현실은 아직 미래의 안갯속에 갇혀 버렸다. 미래에서 가져온 것은 내 몸 하나와 온전한 미래의 기억뿐이다. 미래에 나와 함께 했던 존재들은 아직은 존재하지 않거나 다른 곳에 존재해서 나와 연결고리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당혹감보다는 궁금함이 먼저 밀려왔다. 내가 왜 과거로, 그것도 1991년 2월로 돌아왔을까? 내 인생에서 가장 상처가 많았던 시기로. 50년을 살아오면서 무의식 속에 억눌려 있던 간절함이 나를 이 시간으로 이끌었을까? 시간을 칼로 잘라낼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1991년을 잘라내어 땅 속 깊숙이 묻어버렸으리라. 부끄러움이란 놈이 결코 찾아낼 수 없도록. 1991년은 내 인생에서 썩은 배추밭 같은 시기였다. 부끄러워서 남에게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통째로 갈아엎고 싶은 시기.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신(아니면 다른 초월적인 존재)이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고장 난 자동차 고치듯이 한 번 고쳐서 다시 살아보라고. 영화에 자주 등장하듯 과거를 흔들면 미래가 흔들린다는데 나는 미래 따위는 제쳐두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즐거워졌다. 이제 다 알고 있는 기억으로 과거의 상처를 닦아낼 수 있겠구나!

나는 나를 ‘나’와 ‘스무 살의 선우’로 구분 지었다. ‘나’는 과거로 떠난 ‘나’이고 ‘스무 살의 선우’는 과거의 ‘나’이다. '스무 살의 선우'는 소심했다. 타인 앞에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순하디 순했다. 특히 여학생 앞에서는 거액의 빚을 진 채무자처럼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래서 '스무 살의 선우'는 국문학과에 합격한 후 학과 학생회에서 예비대학을 한다고 연락이 왔을 때도 아버지가 아파서 못 간다는 거짓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예비대학에 참석했다. 선배들의 안내를 받아 여학생들이 대부분인 동기들과 캠퍼스를 거닐고 도서관도 구경하고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선배의 동상에서 묵념도 했다. 그리고 점심 때는 학생식당에서 밥도 같이 먹었다. '스무 살의 선우'는 상상도 못 했겠지만 나는 천연덕스럽게 여학생들에게 농담도 건넸다. 나의 머리에 자리 잡은 50년 묵은 세월이 여자 동기들을 한낱 어린애로 보이게 만들었다.

“너는 동아리 뭐 선택할 거니?”

저녁 술자리에서 한참을 떠들던 중에 선배가 나에게 불쑥 물었다.

“글 쓰는 동아리요.”

나는 망치로 무릎을 쳤을 때 순간적으로 다리가 반응하듯이 선배의 말에 무조건 반사했다. 말이 뇌를 여행하지 않고 입술 사이에서 바로 튀어나온 것이다.

“잘 됐다. 우리 과에 시를 쓰는 동아리가 있는데 거기 들어가면 되겠네.”

“아니요. 저는 소설을 쓰고 싶은데요.”

“시 쓰는 것과 소설 쓰는 게 뭐가 다른데?”

“글쎄요, 시는 나를 지워가면서 쓰는 것 같고, 소설은 나를 찾아가면서 쓰는 것 같아요. 나는 나를 찾고 싶거든요.”

'스무 살의 선우'는 1991년을 고전문학연구회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초라한 동아리에 속해 있었다. 그 동아리에 가입한 이유는 조용하게 앉아 있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교수님의 한문고전 강독을 듣는 것이 동아리 활동의 전부였다. 이른 아침마다 '스무 살의 선우'처럼 소심한 아이들 열 명 정도가 소심하게 앉아서 소심하게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강의가 끝나면 소심한 발걸음으로 소심하게 자기의 목적지로 흩어졌다. 동아리 활동이 의무가 아니었다면 '스무 살의 선우'는 어떤 동아리에도 가입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욱더 아웃사이더로 전전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네 말은 시를 쓰는 것은 내가 아니라 시의 영(靈)이 마치 뮤즈처럼 나를 조종해서 쓰는 거란 말이지?”

비아냥이 잔뜩 섞인 말투의 P였다. P는 그렇게 시를 쓰는 학과 동아리에 가입했고, 나는 소설을 쓰는 연합동아리 ‘유월’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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