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수없이 많은 진상을 마주친다. 진상은 대개 행동거지로 나타난다. 진상은 부리거나, 피우거나 혹은 떨어야만 발현된다. 즉, 가만히만 있으면 그 사람이 진상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은 나이가 들수록 좌우명 현판에 새겨두어야 할 명언이 되어간다. 그래서 난 되도록 가만히 있고자 한다. 상대방이 '개'진상이 아닌 이상.
얼마 전 사무실로 다급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한 고객의 설비보수를 담당하는 업체 사장님이었다. 그분은 다짜고짜 2주 후에 고객 설비 작업을 진행하려는데, 우리 측에서 준비가 되었냐는 내용이었다. 나도 새로운 부서로 발령받은 지 2주도 채 안 된 상황이라, 전화 응대 후 전후사정을 확인해 보았다. 작년 9월에 처음 접수된 작업이었다. 당시 내 전임자가 적어도 1년 이상 준비기간이 필요하다고 고객 측으로 공문으로 회신한 내역이 있었다. 이 내용을 전화로 다시 말씀드렸다. 사장님은 공문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때부터였다. 진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장님은 다급했던지 직접 사무실로 찾아왔다. 팀장님과 나를 테이블에 불러 앉힌 뒤 간곡한 눈빛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좀 안 되겠냐 사정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사장님의 표정이 너무나 진심이었고, 상황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서 검토해 본 뒤 연락드린다 말씀드렸다. 재검토 결과 전임자가 응대했던 대로였다. 우리 회사 기준 상 당장 2주 후에 업체 쪽에서 요구한 작업을 위한 준비가 불가능했다. 이 내용을 전화로 다시 알려드리자 사장님은 무척 난처해하는 듯하더니 막무가내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내가 마음먹고 하면 되지 않느냐, 그 기준에서 편법으로 하면 할 수 있다. 자기가 우리 회사 속사정을 잘 안다 등등. 이 아저씨가 뱀이라도 구워삶아 드셨나 싶을 정도였다.
끝끝내 안된다는 내용을 전달했으나, 사장님은 다시 한번 사무실로 찾아왔다. 사장님이 찾아왔을 때 난 외근을 나갔거나 휴가였어야만 했다. 다시 찾아온 사장님은 마스크를 쓰지 않으셨다. 또다시 안 되는 걸 되게 해 달라 사정하는 사장님의 눈을 쳐다보는 순간, 보지 말아야 할 검은 실선이 목격됐다. 성토하는 사장님의 얼굴 한가운데에 자그마한 코털이 삐져나와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사장님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내 모든 신경이 코털에만 집중됐다. AI챗봇처럼 재차 안된다 대답하고서 겨우겨우 사장님을 돌려보냈다. 난 결국 그날 하루종일 코털의 망령에 사로잡혀 버렸다. 밥을 먹다가도, 커피를 마시다가도, 운전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검은 실선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진상이 남긴 잔상이었다.
진한 잔상을 남기신 그날 이후로는 다행히 사장님이 사무실에 찾아오진 않았다. 그러다 오늘 근 열흘 만에 사장님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사장님은 똑같이 안되겠냐 물어왔고, 나는 또 똑같이 안된다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은 뒤 겨우 잊어낸 잔상이 피어올랐다. 진상이 되지 않기 위해 더더욱 치열하게 가만히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