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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Oct 02. 2021

아내가 허물을 벗는다.

좋은 한옥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사계절을 지내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사계절 구분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기후 특성상, 한옥은 모든 계절에 적합한 가옥이 되기 위해 다양한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해의 각도를 고려해 처마 길이가 정해지며, 여름엔 바람이 불어오는 남동 방향의 바람길이 열려있고, 한옥 바닥에 깔린 하얀 모래는 반사된 햇빛의 간접 조명 역할을 해준다. 이러한 요소들이 제 역할을 하는지 알기 위해선 한옥에서 사계절을 온전히 겪어봐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연애를 한다면 사계절, 즉 1년은 같이 지내봐야 적어도 그 사람이 어떤 색깔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상대방이 갖고 있는 빛깔과 온도시간을 들여 맞춰본다. 상대방이 나와 맞는 사람인지를, 내가 상대방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조금씩 알아간다. 사계절을 함께 보낸 뒤(혹은 보내기 전에도) 연애는 두 가지 결말을 맞이한다. 결별하거나 결혼(장기 연애를 포함해서)하거나.


결별의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방과 잘 안 맞다거나, 또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결별한다.

결혼의 이유도 간단하다. 상대방과 잘 맞아서, 그리고 현실적인 이유 덕분에 우리는 결혼한다.


30대 미혼 인구 비중이 10명 중 4명 꼴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즉 6대 4의 비율로 30대 중 누군가는 기혼자이며, 다른 누군가는 미혼자인 세상이다. 결혼이 의무사항이 아닌 시대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결혼이라는 제도가 연애의 목적지 근처로 일러주는 내비게이션 역할은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 신혼에 취해 결혼을 신봉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당하게 깃발을 흔들며 외치고 싶다. 미혼자들이여 유부 월드로 넘어와라. 미지의 세계가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이렇게 위험천만한 미지의 세계를 초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만큼 탐험할 가치가 있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 인생 선배들의 썰을 듣거나 TV 속 중년 부부들의 모습을 보면서 녹록지 않은 유부월드의 앞길이 걱정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탐험을 함께할 동료모집에 앞장서는 이유는 유부월드가 재밌기 때문이다. 게임으로 치면 연애는 체험판, 결혼은 특전까지 포함된 풀패키지 에디션이다.



연애하며 알아가던 여친(現 아내)과 지금의 아내(舊 여친)는 같은 사람이지만 사뭇 차이가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내 아내는 허물을 벗는다는 걸 결혼하고 알게 됐다. 연애할 땐 몰랐던 사실이다. 당연히 같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던 사실이기도 하다. 그녀는 집에서 잠옷을 입고 있다가 외출할 때 고스란히 자신의 자취를 아래 사진처럼 남겨놓고 간다. 잠옷만 달라질 뿐 그 형태나 크기가 매우 비슷해 신기할 때도 있다.

아내의 허물

옷방에 남겨진 아내의 허물(잠옷)을 옷걸이 걸어두며 생각한다. 아내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지금까지 알게 된 것보다, 앞으로 알아갈 게 더 많다는 사실을. 연애의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재밌고 흥미로운 어드벤쳐가 가득할 듯 하다.


이쯤에서 연애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확실하게 해 두자. 목적지는 사랑이다. 사랑은 어렵다. 사랑에는 시간이 든다. 천천히, 진득하게 나 자신과 상대방을 위해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 것이다. 결혼했으니 더 사랑에 매달려야 한다. 상대방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그곳이야말로 이 유부월드에서 내가 다다르고 싶은 최종 목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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