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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Sep 10. 2021

나는 인싸 아내의 남편입니다.

내 아내는 핵인싸다. 나는 인싸이고픈 아싸다. 인싸 아내를 만나 인싸이고픈 남편은 인싸의 삶을 알아가고 있다.


올해 초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이사오며 입주민 단톡방이라는 신문물을 영접했다. 입주민 단톡방? 친구들과 부서원들과의 단톡방은 있어도 입주민 단톡방은 처음이었다. 참여 코드를 입력 후 동호수와 닉네임을 설정하고 오픈채팅방에 들어섰다. 세대수가 많은 아파트인지라 단톡방엔 무려 1,000명이 넘게 상주중이었다. 동호수가 쓰인 명찰을 달고서 입주민들은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파트 근처 맛집 사진, 실시간 흡연 및 층간소음 제보, 쓰레기 무단 투척 사례, 단지에서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의 미담 스토리 등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입주민 카톡방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됐을 무렵이다. 아내의 카톡 채팅방 리스트엔 못 보던 단톡방이 눈에 띄었다. 단톡방 이름은 OO 2030( OO : 아파트 이름 약자)이었다. 입주민 중 이삼십대들이 별도로 꾸린 단톡방이었다. 아내는 나한테이 단톡방에 들어오라 영입제의를 했으나 거절했다. 딱히 할 이야기도 없었고 뭔가 세대별로 편가르기한 느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체 단톡방에서 눈팅하는 걸로 족하다 생각했다.


 단톡방은 2030만 있는 게 아니었다. OO 4050, OO 공구방, OO 야구모임, OO 풋살방 등 우리 아파트는 카톡을 통해 거대한 부족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2030방은 땡기지 않았으나 풋살 단톡방에 관심이 갔다. 건강하게 입주민들과 풋살을 하겠다는 부푼 마음으로 풋살 단톡방에 잠시 몸을 담갔다. 실제로 정기 모임에도 한번 참석해서 풋살을 했다. 그 한번이 마지막이 됐다. 소개팅을 나가 맘에 들지 않는 상대를 만나듯.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열리는 정기 풋살에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나가지 않다 보니 도둑이 제 발 저린 꼴로 카톡방을 슬며시 나왔다. 나도 한때는 여러 모임을 주도하던 혈기왕성한 젊은이였는데...인싸가 되긴 글렀구나 싶었다.


나와는 반대로 아내는 2030 방에서 활발히  뛰놀고 있었다. 2030 단톡방을 만든 방장 언니를 비롯해 4명 정도와 무척 친해졌다. 그중 방장 언니와 PT도 같이 다닌다. 다들 같은 아파트에 살다 보니 아내는 시간만 맞으면 수다를 떨러 이 집 저 집 깡충깡충 돌아다닌다.


친해진 4명 중 한 명은 우리 옆집의 27세 청년이다. 이 친구는 주식으로 치면 저평가주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출중한 요리실력, 탄탄한 재테크 마인드, 남을 생각할 줄 아는 관대함까지 지덕체를 고루 갖췄다. 연애 스타일까진 모르겠지만 됨됨이만 봤을 땐 결혼하면 우리 동네의 최수종이 될 확률이 유력하다.


얼마 전에는 그 친구가 내 아내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에게 소집명령을 내렸다. 자기 친구들과 먹기 위해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회를 사 왔는데 양이 많다고 회를 나눠준 것이다. 라인업이 화려했다. 자그마치 잿방어, 민어, 전복. 아내는 접시를 들고 옆집에 가서 은총을 선사받고 왔다. 접시 위에 가지런히 플레이팅 된 회를 보자니 가슴이 웅장해졌다. 옆집 주민에게 오마카세급 융숭한 대접을 받을 줄이야.

옆집의 오마카세. 옆마카세

이웃주민에 회까지 얻어먹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인싸 아내가 아니었다면 엘리베이터 앞에서 옆집 친구와 머쓱하게 인사만 나눴을 테다. 잿방어의 그림자도 못 봤을 거다. 인싸 아내 덕분에 좋은 이웃사촌을 두게 됐다.


처음에 나는 아내가 2030 단톡방에 들어간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회를 얻어먹어서 마음이 바뀐 건 아니) 아내는 친해진 멤버들과 음식뿐만이 아니라 이것저것 주고받는 품앗이도 한다. 아내를 따라 나도 같이 그 멤버들과  몇 번 만났는데 다들 좋은 사람들이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요즘 시대 인싸 아내 덕에 이웃간의 정을 넉넉히 누리게 됐다.


인싸 아내의 남편. 앞으로도 쭈욱 잃고 싶지 않은 타이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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