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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Nov 24. 2021

아내의 택배박스가 싫다

결혼에는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은 결혼의 필요조건이지만, 사랑한다고 무조건 결혼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엔 사랑의 힘을 믿었다. 사랑만 있으면 결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결혼을 하고 나서 조금씩 깨달아가는 중이다. 돈이 문제다. 미화해서 표현하면 결혼은 물질적 토대 없이 영위할 수 없다.




얼마 전 대출 만기가 다가와 대출을 연장하러 은행에 다녀왔다. 지금 집을 살 때 들어가 있는 신용대출이다. 최근 기준금리가 오른 터라, 대출 이자가 늘겠거니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금리는 1%가 넘게 올랐다. 한 달에 내야 할 이자가 약 8만 원 정도 올랐다. 내 한 달 삶의 어딘가에서 8만 원어치를 덜어내야겠구나 싶었다. 금리 인상 시기인 만큼 앞으로 내야 할 이자는 더 늘어날 테지. 늘어난 이자에 급여통장은 더 헐거워지겠지만, 그만큼 더 내 삶을 조이면 문제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현관문엔 택배박스가 놓여있다. 내 건 아니었다. 아내가 시킨 것이었다. 내용물이 무엇이 됐든 별안간 짜증이 났다. 은행에서 인상된 대출이자를 덤덤하게 고지받던 마음이 일렁였다. 뭘 산 거지? 나만 우리 가계 재정의 안위를 생각하는 건가 싶었다.


내용물은 아내가 주문한 니트였다. 하늘색 컬러의 화사한 케이블 니트. 이런 스타일의 니트가 없어서 하나 샀어. 라며 아내는 구매 이유를 들었다. 필요에 의해 산 옷이라 하고, 아내에게 잘 어울려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달려있는 가격 택을 확인해 보니 공교롭게도 8만 8천 원이었다. 늘어난 대출이자가 니트의 택에 찍힌 것처럼 보였다.


니트가 오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또 다른 택배박스가 풀어진 채 현관에 놓여 있었다. 이번엔 또 뭐지? 그릇과 보온병이었다. 아내는 항변한다. 3개월 만에 그릇 산거야. 할인해서 만원도 안 해. 보온병은 원래 5만 원 하던 거 세일해서 2만 원 대에 샀고. 그녀의 논리에 이번에도 별다른 말대꾸는 하지 않았다.


나도 최근에 청바지를 한 벌 샀다. 회사 복지포인트로 구매해 실제로 나간 돈은 없었다. 큼지막한 택배박스로 배송된 청바지를 얼른 입어보았다. 정작 내 물건이 오니 기분이 좋았다. 청바지를 입은 나를 보며 잘 어울린다 아내는 말해줬다. 내 택배가 온 걸 보고 아내는 어떤 짜증도 내지 않았다.


아내가 흥청망청 돈을 쓰는 것도 아닌데, 내용물이 뭔지도 모른 채 아내 이름이 찍힌 택배박스만 보면 괜스레 짜증이 났던 이유는 무엇일까. 남의 떡이 더 커 보여서 그랬던 걸까. 나름 가장이라고 늘어난 대출이자 때문에 팍팍해져 버린 걸까. 세상 쿨하게 까짓것 이자 8만 원 오른 것쯤이야 라고 치부해놓고선, 아내가 시킨 택배에는 온갖 물음표를 갖다 댔다.


아내의 택배박스가 여전히 탐탁지는 않다. 그래도 마음을 고쳐먹었다. 택배에 담긴 아내의 고민과 망설임을 알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난 뒤, 아내는 10만 원이 넘는 옷이나 물건들은 거의 산 적이 없다. 사는 것들도 대개 생필품 위주이다. 매번 돈타령하는 것 같아 아내에게 미안하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결혼은 사랑을 생활로 바꾸는 사업이다. 사업에 필요한 비용들을 아끼고 적절히 분배해야만 성공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금리가 오르면서 언론에는 연일 '영끌족'을 걱정하는 기사를 쏟아낸다. 그 영끌족 중 하나로서 말하고 싶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대출이자가 늘어났다고,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서 살지 않는다. 택배박스에 일희일비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문제없이 나아가고 있다. 택배를 신경 쓴다는 게 우리 부부가 잘 살고 있다는 반증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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