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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Dec 13. 2021

쓰기로운 유부생활

2년 차 유부남, 쓰기에 눈뜬 해

2년 차 유부남인 나는 올 한 해를 쓰기롭게 보냈다. ‘쓰기’라는 동사가 내 삶에 들어와 사칙연산 부호가 되었다. 쓰기는 삶의 의미를 배가해줬고, 그 의미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었다. 썼기 때문에 욕심을 덜어냈고, 물질적, 정신적 자산은 더해졌다. 쓰기롭게 살면서 어렴풋이나마 삶의 해답에 가까워진, 의미 있는 한 해였다. 


#1. 글

첫 번째 쓴 것은 글이다. 지금 이 순간 글을 쓰고 있게 된 시작점은 올해 초, 우연히 알게 된 온라인 글쓰기 모임이었다. 6주 간 매주 사진을 주제로 에세이를 작성하면 됐다. 인상 깊었던 선물, 좋아하는 장소, 현재의 삶을 나타내 주는 사진 등이 소재였다. 여태껏 다이어리에만 끄적이던 내 감상과 생각을 다른 사람과 나눠야 한다는 부담감에 참가를 다소 망설였지만, 뭔가에 홀린 듯 모임에 참가 신청했다. 나 혼자만 참가하게 돼 호스트 분과 1:1 과외처럼 모임을 갖게 됐다. 단 둘 뿐이라 모임 시작 하루 전까지 해야 되나 고민했지만, 이왕 마음먹은 거 해보기로 했다.


잠깐의 고민과 망설임에 포기했다면, 올해의 내가 없었을 것이다. 6주간의 쓰기 모임 덕분에, 글쓰기에 용기가 생겼다. 내가 쓴 글을 직접 소리 내어 읽어보고 합평을 받으며 새로운 결의 감정을 느꼈다. 낯부끄럽고 긴장됐지만, 학창 시절 국어시간에 무미건조하게 지문을 읽던 것과는 달랐다. 옹알이를 시작해 세상의 소리와 낱말을 알아가는 아이처럼 글쓰기의 순수한 즐거움을 맛봤다. 해방되는 기분이었다.


이 모임에서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자신감이었다. 호스트분께서 세심하게 내 졸문들에 피드백을 주셨고, 마음속에 고이 접어 둔 목표였던 브런치 작가에 도전해보라 적극 권유해 주셨다. 덕분에 ‘언젠가 밥 한 번 먹자’ 정도로 치부했던 목표가 현실로 이뤄졌다. 호스트님의 조언을 받아 작가 신청을 했고 운 좋게도 한 번에 브런치 세계에 입성했다.


6주 간의 시간은 글쓰기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어줬다. 이 세계에 발을 딛고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며 어드벤처를 체험하고 있다. 재밌기만 할 줄 알았던, 1년 남짓한 글쓰기의 시간은 좌절과 고뇌가 더 많았다. 그럼에도 글쓰기는 놓지 못할 것 같다. 이 고단함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리라 희망하기 때문이다.


#2. 돈

두 번째로 쓴 것은 돈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집에 돈을 썼다. 올해 초, 살고 있던 전셋집에서 나와 대출을 끌어 집을 매수했다. 덕분에 내 이름이 찍힌 부동산 등기와, 30대 영끌족이라는 호패를 전리품으로 얻었다. 각종 언론보도에 30대 영끌족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반가울 지경이었다.


30여 년 인생을 통틀어 이만큼 돈을 써본 것은 처음이었다. 집을 산다는 건 부루마블처럼 단순한 게 아니었다. 집을 사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등기를 치는 과정까지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았다. 집을 사며 쓴 돈은 내게, 인생은 쉬운 게 아님을 일러줬다. 정신 차리고 살라며 매달 대출이자라는 회초리를 꺼내 든다. 살면서 맞았던 어떤 매보다 따갑다. 


집에 대한 고민은 결혼하기 전부터 집요하게 날 물고 늘어졌었다. 아내와 같이 신혼집을 고민하던 시기가 떠오른다. 우리 둘의 직장을 고려한 동네 위치부터, 전세냐 매매냐를 놓고 수도 없이 아내와 토론을 벌였다. 격론 끝에 아내 직장이 가까운 강서구에 아파트 전세를 얻었다. 15년 정도 됐던 아파트에서 벅찬 미래를 꿈꾸며 신혼살림을 꾸렸다. 집 근처 편의시설도 많고, 역도 가까워 생활하기엔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가슴 한 켠에선 불안함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연일 오르는 수도권 집값 그래프를 볼 때마다 반대로 내 마음은 꺾여만 갔다. 이대로 있다간 내 집을 갖지 못할 것 같다는 씁쓸한 확신이 날 삼켰다.


이 확신은 우리를 결국 집을 사게 만들었고, 결론적으로 집을 산 뒤로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하지만 집을 샀다고 모든 번뇌에서 해방되는 건 아니었다. 기존 전셋집보다 배 이상 늘어난 대출금을 깔고 앉은 집에서는 이전보다 생활의 군더더기를 덜어내야 했다. 욕구를 필요로 둔갑했던 쇼핑을 줄였고, 밥은 되도록 집에서 먹게 됐다. 집을 사지 않았다면 못했을 일들이다. 그래서 올 한 해를 돌아보며, 내 집에게 정성 어린 손편지를 쓰고 싶다. 너 때문에  인생의 고단함과 팍팍함을 깨달았다고. 그렇지만 네 덕분에 우리 부부는 조금은 더, 잘 살게 됐다고.


#3. 시간

유부남이 된 뒤로 시간이 더욱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시간을 소중하게 쓰려고 노력했다. 우선순위를 정립했다. 나 자신과 가족을 최우선으로 뒀다. 새로운 관계보다 기존의 내 사람들을 더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관계라는 푯말이 꽂힌 화단에 새로운 꽃을 심는 대신, 흙을 갈아주고 주기적으로 물을 뿌려주었다. 단단한 토양 위에서 기존에 심었던 꽃들이 더 풍성하게 피어나게끔 노력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없는 약속을 만들던 스타일이었다. 주말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죄악처럼 느껴졌다. 주말에는 뭐라도 해야 해라는 무언의 압박감에 여러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약속을 잡곤 했다. 사람들을 만나야 힘을 얻는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만의 시간에서도 충분히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음을 확인했다. 특히나 결혼하고 나니, 나만의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내의 부재를 환영하는 철없어 보이던 유부 선배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됐다. 하지만 부재가 잦아지면 반대급부로 아내에게 의존하게 되는 나도 발견했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늘렸다. 웃으며 찍은 가족사진이 '이땐 좋았지'가 되지 않게 추억의 현행화를 실천했다. 양가 부모님들을 자주 뵈기 위해 노력했다. 오가는 길이 조금은 피곤할지라도, 함께 할 수 있는 순간을 최대한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이 결혼 후 늘어난 가족 수에 비례해 내가 받은 사랑과 안온함에 보답하는 방법이었다. 앞으로도 지속해나갈 것이다.   


올 한 해 돈과 글, 그리고 올바르게 시간을 쓰며 내 삶은 전환점을 맞았다. 그 모든 순간들이 한데 어우러져 지금의 날 빚어냈다. 사고와 감정의 근육은 글을 쓰며 조금씩 테가 나기 시작했고, 무분별한 낭비를 일삼고 핫딜에 기민하게 반응했던 내 소비습관은 도수치료를 받았다. 시간을 알맞게 쓰면서, 순간순간의 소중함을 알알이 곱씹을 수 있었다. 썼기 때문에 알게 됐던 이 모든 깨달음을, 사랑과 온정이 넘치는 연말 시즌을 빌어 감사히 여긴다. 내년에는 더 발전된 모습으로 쓰기로운 유부생활을 이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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