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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Jan 23. 2022

프로듀스 마더, 파더

나의 진로는 부모님이 제작하셨다.

"아들, 한의대를 가는 게 어때."


고2가 되던 18살, 나는 인생에서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녀서 1학년을 마칠 때쯤 문과, 이과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친구들과 어디로 갈지 열띤 논의를 펼쳤다. 넌 어디 갈 거냐. 모르겠다. 이과가 나으려나? 이과는 근데 수2(7차 교육과정 기준)를 해야는데. 미적분 어려울 거 같은데. 문과는 사탐 과목 외우기만 하면 되지 않나? 문과가 더 나을 거 같기도 하고.


나는 당시 반반이었다. 뚜렷하게 무얼 하고 싶다, 어떤 직업을 갖고 싶다는 꿈이나 목표는 없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뭘 좋아하는지를 몰랐다. 문과든, 이과든 별 상관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앞날이 흐릿하던 아들에 비해 부모님은 달랐다. 아들의 미래에 꽃길만이 있을 거라 확신하셨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첫 중간고사. 얼떨결에 전교 2등을 거머 줬다. 부모님은 무척 기뻐하셨고, 그런 부모님을 보며 나도 내심 뿌듯했다. 학교에서는 첫 시험에서 전교 순위권에 든 학생들을 특별대우해줬다. 1학년 여름방학 때는 도교육청 주관으로 영재교실 비슷한 수업을 듣기도 했다. 도내에서 공부로 난다 긴다 하는 친구들이 모여, 누가누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푸는지 자웅을 겨뤘다. 아침부터 뜨거운 여름날의 공기를 뚫고서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과학실에서 보냈던 시간들은 내게 한 가지 확신을 주었다. 나는 영재가 아니다, 그리고 이 영재교실에 다니기 싫다.


전교 2등 타이틀은 결국 첫 중간고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중학교 재학 시절 내내 반에서 2-5등 수준은 유지했지만, 내가 특출 나게 머리가 좋거나 공부를 잘한다는 자각은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 눈에는 내가 달라 보였다. 전교 1등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거라 믿으셨고, 그만큼 내게 거는 기대가 크셨다. 그 기대라는 씨앗이 내게 틔워졌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부모님은 내 진로를 결정하셨다. 정작 씨앗이 심어진 밭의 주인은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한의사가 되기로 '예정'돼 있었다. 내가 평소 성격도 차분하니, 한의사 같은 직업이 좋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니 공부는 더 버거워졌다. 상위권, 좋은 대학이라는 막연한 목표를 지렛대 삼아 나 스스로를 탄환처럼 쏘아 올렸다. 목표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시착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문과, 이과를 선택할 시기가 다가왔다. 이미 내 진로를 점지해둔 부모님은 나와 달리 별다른 고민 없이 이과에 가라 하셨다. 한의사는 이공계열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이과를 선택했다.


이과에 진학해서도 나름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한의대를 합격할 정도의 성적에는 못 미쳤다. 초등학생 때 대통령을 꿈꾸다 고3이 되면 결국 성적에 맞춰 진로가 바뀌는 여느 평범한 학생처럼 되어갔다. 고3이 됐을 때까지도 부모님은 내심 내가 한의대에 붙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놓지 않으셨다. 올곧은 부모님의 믿음은 내 마음속으로 직진해 부담으로 내려앉았다. 수능을 보기 전 마지막 9월 모의고사를 치르고서야 부모님께서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우리 아들이 한의대를 가긴 어렵겠구나.


수능 성적은 부모님뿐만 아니라 내 기대에도 못 미쳤다. 수능이 끝나고서 재수학원을 알아보기도 했다. 결국, 재수는 하지 않았다. 또다시 이 쳇바퀴 같은 굴레에 던져지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1년 더 시간을 투자한다고 해서 좋은 성적을 받을 것이란 확신이 없었다. 나 자신이 무얼 하고 싶다는 목표나 꿈을 위한 공부가 아닌, 부모님이 내게 거는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한 공부를 다시 할 자신이 없어졌다.


재수는 하지 않고 성적에 맞춰 수도권 대학의 전자공학과에 입학하게 됐다. 공대에서도 취업이 잘되는 학과이니 괜찮을 거라는 선생님들과, 부모님의 격려와 칭찬에 마지못해 수긍했다. 대학에 합격했지만 기쁨보다는 정규 교육과정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안도감이 더 컸다. 뜨거운 여름날 영재교실의 차가운 공기가 싫었던 순간부터 이과를 선택하고 공대에 입학하는 6년 간의 학창 시절을 끝낼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그 6년의 시간에 내가 오롯이 존재한 적은 없었다. 연예기획사의 아이돌 연습생처럼, 프로듀싱을 받아 세상으로 데뷔하게 됐다. 프로듀서는 내 부모님이었다. 스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아이돌 연습생과는 달리, 나는 그저 세상과 부모님의 뜻과 의지로 키워졌고 세상에 나오게 됐다. 그저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뻤을 뿐이다.



시간이 꽤 흐른 지금, 나는 프로듀서 역할을 맡아주신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가 아쉬울 뿐이다. 부모님께서 내 의사를 살펴보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지 내가 차분하다는 이유로, 중학교 때 전교 2등을 했다는 돌발적 데이터를 토대로 내 진로를 미리 결정하셨다. 그 결정은 너무나 1차원적이었고, 그 결정 안에 내가 없었다. 이미 정해져 버린 진로를 허겁지겁 좇느라, 당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탐색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들을 놓치고 말았다. 


사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건 평생에 걸친 과업이다. 많은 품을 들여야 하는 일이기에, 아직 주민등록증도 나오지 않은 학창 시절에 이를 끝내기는 어렵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과업은 내가 아닌 다른 어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영재교실이 싫으면 싫다고, 한의대는 나랑 안 맞는다고 말할 수 있었다면 내 모습과 삶의 양태는 지금과 많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삶에서 만약은 없지만, 만약 어릴 때로 돌아간다면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싶다. 내 삶의 프로듀싱은 내가 하고 싶다고. 부모님의 보살핌과 도움은 따뜻했지만, 그 따뜻한 둥지에서 날갯짓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 채 푸드덕거린 학창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고. 훗날 내가 부모가 된다면 자식에겐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아들, 네가 하고 싶은 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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