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시절 나는 어쿠스틱 기타 코러스 동아리에 몸담았다. 동아리 이름을 풀이하자면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신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동아리는 매년 '발표회'라는 행사를 했다. 졸업한 선배들(OB)을 학교로 초대해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발표회를 이루는 노래 구성은 다양하다. 최신 유행가를 어쿠스틱 반주로 편곡한 노래, 동아리 선배들로부터 이어져온 동아리 자작곡들 등을 부른다. 선배님들 앞에서 꾸리는 재롱잔치인 셈이었다.
3학년이 돼서 참가한 발표회 때였다. 친하게 지내던 선배 형 두 명이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매해 발표회 때마다 졸업생 코너가 꾸려지는데, 그 둘의 차례가 온 것이다. 스무 살부터 봐온 형들이 졸업을 한다는 게 실감이 잘 안 났는데 그들이 선곡한 노래는 대학생 신분이 종료됐음을 고하는 수준이었다. 28, 29살인 그들은 기타를 잡고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불렀다. 덤덤하게 가삿말을 내뱉는 형들의 노래를 가만히 관객석에 앉아 들었다. 서른 즈음이 아니었던 나는 선배들이 부르는 노래가 그저 귓가에 스칠 뿐이었다. 노래는 귓가에 스쳤으나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모습은 선명히 기억에 남아있다. 마치 어깨동무를 하고 배낭을 멘 채 수평선 너머로 멀어져 가는 듯했다. 노래를 읊조리던 형들이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말이다.
2018년, 서른으로 넘어왔다. 89년생 뱀띠 친구들의 화젯거리 중 하나는 '서른이 되니까 어때'였다. 대답들은 대동소이했다. 서른이 대수냐. 별 감흥 없다. 아직 우린 젊지 않으냐. 나는 빠른 90이라 아직 서른 아니다. 등등.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이 앞자리가 3으로 바뀐 것 이외에 달라질 건 없었다. 똑같이 회사를 다니고 있고, 아직 젊다고 생각하고 있고, 하고 싶은 것들은 여전히 많이 있다고.
서른, 30대라는 단어의 무게가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한 건 작년부터다. 구체적으로 점찍자면 결혼을 하고부터다. 뉴스에 실리는 문장들 속에서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출산율 출생아 수 역대 최저". "벼락 거지 두려움에 떠는 MZ세대." "부모보다 가난해지는 최초의 세대". 20대 땐 막연한 낙관이 있었다. 다 잘 될 거야. 별일 없겠지. 괜찮을 거야. 뉴스를 봐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치부했다. 부푼 희망에 차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막연한 낙관은 위험함을 깨달았다. 희망과 현실의 괴리는 컸다.
현실은 내게 더 눈을 부릅뜨고 살아야 한다 다그친다. 꿈과 희망에 취해 현실을 회피할 수 없는 나이가 됐다. 여태껏 B학점 이상의 삶을 살아왔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봤지만, 그저 지나간 과거이다. 과거를 뒤돌아봤을 땐 B학점의 성적표 뒤에 가려진 것들이 보였다. 많은 것들과 멀어지고 있었다. 젊으셨던 부모님, 치기 어린 나 자신, 연락이 소원해진 친구들. 아쉬움과 감상에 젖어 숙여진 고개는 금세 혹독한 현실에 들어진다. 다시 고갤 들어 앞을 쳐다봐야 한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더 척박하고 험난해 보인다. 세상은 더욱더 어려운 임무를 계속해서 내놓는다. 내 집 마련, 직장 내에서의 인간관계와 승진, 훌륭한 남편이자 예비아빠, 부모님 챙기기. 다 잘 될 거야라는 구호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서른이 넘고서야 동아리 선배들이 불렀던 김광석의 노래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의 떨림이, 그의 허무함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서른을 조금 더 넘기고서, 결혼을 하고서 알아가고 있다. 머물지 않는 청춘을, 사랑을, 사람을 다 잡으며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놓아줄 건 놓아주어야만 내 삶의 물길이 새로이 열린다는 것을. 새로이 흘러올 물길이 비록 짜고 텁텁하더라도 꿋꿋이 받아들여야 하는 게 어른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