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 Aug 14. 2022

김대리, 골프 좀 치나? 아님 테니스는?


하나의 유령이 직장인들 사이에 떠돌고 있다. 왼손에는 골프채, 오른손에는 테니스 라켓을 들고 있는 유령이.

골프 쳐? 아님 테니스 쳐? (출처: pixabay)

바야흐로 춘추 스포츠 시대다. 직장인들 사이에 골프, 테니스를 필두로 한 운동 열풍이 거세다. #골린이, #골프스타그램, #골친 #테린이, #테니스타그램 #테니스룩 등 골프와 테니스에 관련된 해시태그를 검색하면 수많은 게시물들을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볼 수 있다. 기성세대의 고인물 운동이라 여겨지던 골프와 테니스가 젊은 세대들도 즐겨하는 ‘대세’ 운동이 됐다.


“운동 하나 정도는 해야 사회생활할 때 좋아.”


이놈의 사회생활이 뭐길래. 일하러 왔는데 운동까지 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운동이 몸에도 좋고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 유지에도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다만 이 운동들이 ‘직장’에 편입되는 순간 본질이 흐려진다. 운동이 업무가 된다. 회사 사람들과 등산을 가면 상쾌한 공기를 맡는 대신 호쾌한 부장님의 파이팅 소리를 들어야 한다. 골프를 치면 라운딩 내내 나이스 샷을 외치고 행여 부장님이 미스샷을 남발하면 모자 아래 가려진 부장님 눈 밑 그늘의 농도를 체크해야 한다. 테니스를 치면 실력 여하에 상관없이 ‘아슬아슬하게’ 상급자에게 패배를 당해야 한다.  주 5일 40시간씩 마주치는 분들과 펜과 컴퓨터 대신 황금 같은 주말에 몸과 공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운동이 노동이 된다. K-직장인들, 정말 고되다.


얼마 전 있었던 일이다. 배부르게 점심을 먹고 나만의 시간을 가지사무실에서 나가려던 찰나였다. 우리 부서에 새로 전입하신 대리님께서 커피를 제안하셨다. 마다할 이유도 없고 대리님과 이야기를 나눌 겸 흔쾌히 수락했다. 대리님을 비롯해 나, 부서 막내, 중견급 대리님 이렇게 넷이서 카페를 갔다. 제안하신 대리님의 커피 쾌척으로 몰토크는 잔잔하게 시작됐다. 회사 업무에 대한 토로, 날씨가 참 덥다는 둥, 육아 팁 등등. 그러다 대뜸 중견급 대리님이 급류를 일으켰다. 자신이 얼마 전 필드에 나갔다가 백돌이를 겨우 면했다며 골프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골프를 치고 있어서 대화가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커피를 제안했던 대리님과 부서 막내는 대리님이 일으킨 골프 급류에 휩쓸려 표류했다. 구명조끼는 그들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어색한 웃음, AI 리액션뿐이었다. 스몰토크의 급류에 휩쓸려간 그들에겐 구명 밧줄을 던져주지 못한 채 그저 이 ‘골프 급류’가 얼른 지나쳐가길 바랬다.


‘회사에서’ 골프 얘기하는 것조차 싫은 티를 팍팍 내긴 했지만 나도 실은 골프를 친다. 다만 내가 골프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회사’ 때문이 아니었다. 부모님에게서 비롯됐다. 5년 전쯤 엄마는 갱년기가 찾아오며 우울증을 겪으셨다. 이를 지켜보시던 아빠는 엄마에게 우울증 극복을 위해 골프를 제안하셨다. 아빠의 권유로 골프를 시작하시며 친구들도 사귀시고 종종 필드에 나가시며 체력도 좋아지셨고, 우울증도 말끔히 사라졌다. 나도 이런 두 분의 모습을 보며 가족끼리 함께 골프 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레슨을 끊고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아빠나 회사 상사들이 골프를 시작하라 내게 종용했지만 들은 체 만 체 했었다. 엄마의 갱년기 극복이 내겐 골프를 시작하게 된 동기부여가 된 셈이다. 마침 아내도 나와 연애하던 시절 골프를 배운 덕에 우리 부부는 부모님과 넷이서 가끔씩 필드를 나간다. 가족끼리 나가면 샷이 잘 안 맞아도 눈치 볼 필요 없다. 그저 맑은 공기를 쐬며 좋은 풍경을 눈에 담고 부모님들과 맛있는 식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될 뿐이다.



가끔 보면 회사에서 골프와 테니스의 효용을 영업사원처럼 설파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지하철 잡상인들이 판매하는 영험한 상품들을 구매하는 확률과 비슷하게 회사에서도  '운동 영업’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정작 그렇게 시작한다 치더라도 운동이 의무처럼 여겨져 금세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 운동을 한다고 해서 사회생활을 더 잘하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안 한다고 해서 사회생활에서 소외되는 것도 아닌데, 억지로 시작했으니 금세 흥미를 잃는 게 당연한 걸지도.


우린 이미 직장에서 업무만으로도 벅찬 세상에 살고 있다. 저마다의 개인 취미생활까지 직장에서 강요받는 세상은 우리들의 피로감을 가중시킬 뿐이다. 골프, 테니스, 등산? 다 좋다. 좋은 건 알겠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사람만 하게끔 내비뒀음 더 좋겠다. 개인의 선택과 취향은 강요되어선 안된다. 직장이 우리의 여가생활까지 휘두르게 냅둬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회인들은 저마다의 삶과 취향이 있음을 존중해주는 세상이야말로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의 구호가 지향하는 유토피아와 더 닮아있지 않을까 싶다.


난 마음먹었다. 골프 영업사원이 되지 않기로. 그저 조용히 가족, 지인들과 골프를 치고 회사 내에서는 되도록이면 ‘골프 친다’는 언급을 자제하기로. 골프 친다는 말 한마디 했다가 겪은 아찔한 경험을 아로새기면서 말이다.


p.s. 아찔한 경험이 담긴 이야기를 부록으로 남깁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청춘이라, 아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