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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oved Sep 04. 2021

저, 여기 남아야 되나요?

아프리카에서 마음의 미각을 회복하다.

최근에야 인정하게 된 사실이지만, 난 입맛이 무척 까다로운 사람이다.


대외적으로 까탈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밖에서는 주시는대로 거의 먹는 편이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면 메뉴 선정부터, 재료나 MSG 첨가 여부까지 따지며 먹는다.


거기다가 냄새에도 민감한 나는 조금만 비린내가 나거나, 식자재가 오래되어 누린내가 나는 고기를 쓰는 집은 두 번 다시 가지 않는 그런 사람.




회사에서 첫 번째 아프리카 출장지인 에티오피아를 가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음식이 어떤지 물었다.


먼저 다녀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살이 빠지신 분들도 있었고,

봉사지역이 수도가 아닌 지방이다 보니, 여느 해외처럼 한인마트에서 식자재를 사는 것도 여의치 않은 곳이었다.


호텔 숙박이 아닌 현지 사업장 센터에서 숙박을 할 예정인 데다가, 봉사지에서 잘 먹고 올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긴 했다.


약 열흘간의 일정.


못 먹더라도 체력이 잘 버텨주기를 바라면서, 팀을 꾸렸다.


사실..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어떤 환경에서도 한국 음식을 해 먹을 의지의 한국인들 아닌가.

이미 김, 라면, 작은 반찬캔 등 만반의 준비도 한 터였다.


우여곡절 끝에(이전 에피소드 참고) 세관을 통과하고 한국음식을 지켜낸 우리는 현지 스태프 K와 가져온 음식을 승리의 전리품마냥 뿌듯해했다.


해외 봉사활동을 할 때, 멤버들 중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못 먹는 사람이 생기면 일정을 건강하게 소화하기 어렵다. 멤버 중에 컨디션이 안 좋은 사람이 생기면 전체 일정에도 많은 차질이 생긴다.


한국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음식을 포기 못해서라기 보다는, 원활한 팀 운영을 위한 필수항목이자 특별히 현지 한국인 스태프의 노고를 치하하는 하사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에티오피아의 전통음식이며 주식인, 인젤라

인젤라(출처:https://www.chefdecuisine.com/recettes/admin/uploads/M_recipe_2278.jpg)

장학금을 지원하는 가정방문에서도, 현지인 홈스테이에서도 어김없이 나오는 회백색의 두꺼운 전병(?).

혹자는 두루마리 휴지 같다고도 표현했다.

테프라는 전통 곡물가루를 구워 만든 솥뚜껑만 한 전병을 둘둘 말아서 계주 할 때 바통 정도 크기로 뚝뚝 잘라서 주기도 하고, 넓게 펼친 위에 갖가지 토핑을 올려서 뜯어먹기도 하는데, 토핑은 개인 살림 형편에 맞게 야채나 고기가 올라가기도 한다.


문제는 이 인젤라가 가지고 있는 시큼한 향과 맛이었다.

발효된 반죽으로 구웠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특유의 맛이 호불호를 나뉘게 했다.


명색이 팀장인데, 현지 음식을 마다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던 터였다.

현지인 가정에서 내어주시는 접시 위에 놓인 인젤라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어, 이거 뭐지?!


묵은지를 좋아하는,

똠양꿍을 좋아하는,

내 취향 저격의 맛은!!


내 얼굴을 보고선 괜찮은 줄 알고 덥석 베어 문 다른 어린 팀원들의 표정이 원망으로 서서히 일그러지는, 극명한 호와 불호가 공존하는 현장이었다.


이 극명한 반응은 일정 내내 계속되었는데, 응급으로 한 끼 건너 한 끼는 한국 음식을 먹어가며 버티는 멤버들에게 2차 위기가 찾아왔다.

현지 홈스테이를 해야 하는 일정이라, 거의 세끼를 연속으로 현지 음식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일정을 듣기만 하고도 사색이 되는 몇 명이 있었을 정도.


현지인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팀원들에게 신신당부했다.


"너무 먹기 힘들면, 조금만 드세요!"

"아예 먹지 않는 건 대접해 주시는 현지 분들에게 예의가 아닙니다."

 

현지인 가정에게 대접받은 인젤라 만찬©beloved

어찌 된 일인지, 팀장인 나는 현지 음식이 입에 찰떡이라 다행이었지만 팀원들이 내내 걱정이 되었다.


다음날 오후,

나의 걱정은 한낱 기우였을 뿐이었다.


불호의 입맛인 팀원들이 이미 비장의 무기를 준비해 갔던 것.

그것은 바로 한국인의 친구, 라면이었다.


사진을 보니, 현지인이 대접해 준 음식을 대강 물린 뒤 한국의 음식을 대접하겠노라며 봉지라면을 선뵌 것이다.

현지인 화덕에 끓여서 대학교 자취방에서 나눠먹던 것 마냥 너 한 젓가락, 나 한 젓가락 하며 라면에 취한 모습이 고스란히 찍힌 채 행복한 표정이었다. (심지어 꼬마김치 팩도 챙겨가셨다;;;)

에티오피아에도 의외로 매운 향신료가 있기 때문에 현지인들이 꽤나 잘 먹었다고 하는 후문까지.  


다시 센터에 모여 삼시세끼 위기극복 경험담을 들으며 우리는 하하호호 웃기 바빴다.

그리고 한국음식들은 열흘 간 팀원들의 귀하디 귀한 만병통치약이 되어 주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K가 우리에게 물었다.

"인젤라 어땠어요? 맛이 있던가요?" 


"아유~ 정말 세끼 연속으로 먹을 때 장난 아니었어요!"

"저 살 빠진 거 보이세요?"


"입맛에 맞았던 사람은 없었나?"


"팀장님이요!"


"어~ 그래요? 그럼 여기 남아야겠네. 음식이 맞으면 게임 끝이지 뭐~!"


시집도 가지 못한 채, 싱글로 아프리카에 남을 수 없다면서 손사래를 치며 다시 한국에 돌아왔지만,

아직도 돌아보면 의아한 것 한 가지.


에티의 인젤라, 케냐 마사이족 소똥집에서 먹었던 우갈리, 우간다의 짜파티….

분명 그리 깨끗하지도, 냄새가 없지도 않았을 텐데..


모두 그 나라만의 맛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나에게는 꽤나 괜찮은 음식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쓰디쓴 삶에 절어있던 마음의 미각이

새롭게 경험하게 된 모든 맛들을 음미할 수 있도록 초기화되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프리카는 그렇게 모든 것을 새롭게 맛볼 수 있는 미각을 깨워주었다.












(제목 사진출처: By Rama - Own work, CC BY-SA 2.0 fr,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63036)


* 내용  개인촬영사진은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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