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는 모두에게 공정하다.
해외봉사팀의 짐 싸기는 개인 여행의 짐 싸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각 항공사 규정에 맞는 무게와 수하물 규격, 개인별 짐 개수 확인은 필수사항.
현지 직원 요청의 공식적인 짐(전자기기, 현지 사업에 필요한 자재들 등), 비공식적인 짐(최애 과자, 라면 등등), 봉사활동물품(각종 교육자료, 선물, 약품 등), 부식류 등 종류도 다양하다.
최대한 효과적으로 넣어서(깨지기 쉬운 물품을 뽁뽁이 대신 오뚜기 카레분으로 둘러싼다든지, 컵라면은 해체해서 컵 따로 면 따로..) 부피를 줄이고, 규정 무게를 맞춰야 하지만 봐줄 만큼 조금 더 넣어봐야 하며, 날짜별로 쓰는 일정을 고려해서 순서대로 넣어야 하는 수리영역 종합예술이라고나 할까.
장사치처럼 보이지 않도록 같은 물건을 한 가방에 많이 넣어서도 안되고, 부치는 수하물 무게를 덜어주기 위해 기내용 가방에 무거운 물건을 잔뜩 넣고 가벼운 척하는 연기력도 필요하다.
게다가, 그 당시 아프리카 국가들은 공항 세관 통과 시에 갑자기 경직된 얼굴로 가방을 열라고 하면서 팀의 물건들을 빼앗아 버리거나, 많은 통관 세금을 물려서 나라살림에 보탬이 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첫 아프리카 팀을 준비하면서 선임인 회사 Y팀장님께 이러저러한 이야길 듣고 나니 팀 짐 싸기는 그냥 내 짐 x 20인이 아니었다.
공항 세관 잘 통과하는지가 봉사팀 인솔의 첫 번째 관문쯤 되는 것 같아 비장한 마음으로 짐 싸기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아이들 선물로 줄 크레파스를 어떻게 나눠서 담아야 하나?'
'김이 너무 많은데, 김장사인 줄 아는 건 아니겠지?'
'부탁받은 중고 프린터기 괜찮으려나?'
팀원들과 회사 강당에 가져갈 모든 물건을 다 펼쳐놓고 나름의 전략회의 소집.
"아무래도 크레파스가 걸릴 거 같아요. 그러니까 이건 세 군데로 나눠서 담아보는 거 어떨까요?"
"프린터기는 기내에 따로 들고 가야 하는데... 이거 너무 딱 걸릴 거 같죠? 박스까지 있잖아요. 무조건 안 보이게 얼른 먼저 들고나가세요!"
"김은 이불 덮어도 되겠네~! 3분의 1은 두고 갑시다..."
드디어, D-DAY.
인천공항 에티오피아 항공사 카운터에 모인 우리는 부산하게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카운터 직원의 인심이 후해서, 조금씩 초과되는 무게를 다 봐주어 무사통과.
처음으로 가는 봉사팀이지만, 팀원들에게 팀장이 처음인 걸 티 낼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능숙한 척, 다시 전략을 하달했다.
"자, 우리가 들고 가는 기내용 짐들, 무거운 거 티 나면 안 되니까 가뿐하게 들고 타야 해요!"
"무게 얼추 다 맞춰서 부쳤으니 이제 들어갑시다!"
무거운 배낭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벼운 척 선반에 올리면서 내심 안도감이 들었다.
'아, 그래도 처음치곤 괜찮았어.'
그러나, 진짜 전쟁터는 현지였기에 방심은 금물이었다.
12시간 가까이 비행해서 도착한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
입국심사를 마치고 단체 짐을 찾고 나서 세관 통과의 시간이 다가왔다.
모두가 초긴장을 하면서 얼른 들고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아, 한 직원이 팀원을 부른다.
이민가방을 열어보라고 하는데, 거기에 뭐가 들어있을지 바로 확인이 어렵기에 모두가 지퍼가 열리는 현장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지이익~"
(크레파스나 약품은 안된다….)
지퍼를 열어보니 김과 부식이 나왔다.
우리가 먹으려고 가져왔다고 하니 다행히 알아듣는 눈치다.
김 많이 안 가져오길 잘했다며, 안도를 하는 순간!
직원의 눈에 팀원의 손에 들린 중고 프린터기가 포착되었다!
(내가 얼른 먼저 느그르그 흣쯔느…)
손을 까딱이며 올려놓아 보라는 공항 직원.
새 거 아니냐면서 기계라서 세금을 물려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아...!!! 박스를 좀 더 허름한 데 넣어왔어야 했어!”
떡 하니, 프린터 그림까지 그려진 박스이니, 직원도 이건 딱 걸렸다 싶었을 것.
마중 나온 현지 한국인 스태프 K까지 합세해서 새 거다, 아니다로 계속 실랑이를 하다가 포기를 모르는 직원에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세금을 내기로 했다.
열 받은 나를 거들면서 K는 이 와중에 나머지도 걸리기 전에 빨리 들고나가라고 눈빛을 보냈다.
눈치 빠른 몇 팀원들이 모두가 프린터기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나머지 짐들을 들고 우르르 밖으로 나가는데 성공!
그래도 큰 금액이 아니라며, 괜찮다고 하는 K 앞에서 왠지 모를 자존심이 상했다.
세관 통과는 꼭 성공하고 싶었는데... 쳇!
세금을 내는 줄 앞에 막 서려는데 갑자기 앞쪽에서 둔탁한 기계 부서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우리는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우리처럼 줄을 서있던 한 에티오피아 중년 남성이 40인치 조금 안돼 보이는 TV를 막대기로 부수고 있었다.
세상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는 퍼포먼스인가 싶을 정도로 과격한 몸짓과 공항을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도 함께.
"무슨 일이래요? 왜 저래요? 저 사람은?"
"글쎄요, 왜 저러지?"
K가 그쪽으로 가더니 현지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그 사람 이야기를 옆에서 들어본다.
돌아오더니, 헛웃음을 지으며 해주는 이야기.
"저 TV, 쓰던 거라고 했는데, 세관 직원이 빡빡 우기면서 세금을 많이 물렸나 봐요. 자기가 산 가격보다 세금을 더 물려서 열 받는다며 그냥 버리고 간다고 저런다네요. 하하하"
아, 동족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이 나라.
한국인이라고 덤터기 씌운 건 아니었구나.
묘하게, '나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무사히 첫 아프리카행 신고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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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출발할 때 엄청 노련한 척했지만, 의료봉사에 사용할 약이 든 이민가방을 한국에 두고 왔다.
(이것은 전설의 레전드…하아.)
모두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사실 팀장인 내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현지에서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약품이 들어있는 가방의 행방을 수소문하다가 알게 된 엄청난 실수였다.
발권 대행 여행사를 통해 인천공항에 확인한 결과 그 가방은 공항 운반 카트에 남겨진 채, 구석 어딘가에서 갈 곳을 잃고 울고 있었다는 후문과......
다행히 팀원이었던 멋진 의사 선생님이 현지에서 안질환에 필요한 다른 약을 찾아내서 봉사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고 하는 훈훈한 마무리가 있었던 그런 전설.
참으로 기억에 남을 첫 번째 아프리카 봉사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