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썬(2022)
유년 시절 젊은 아버지와의 짧은 튀르키예 여행을 회고하는 형식의 이 영화는 오직 주인공 소피의 시점에서 재생된다. 영화의 화자인 그녀는 어린 부녀를 추상적이지만 객관적으로 그리길 시도한다. 이게 무슨 모순되는 말인가 싶기도 하다. 추상과 객관은 나란히 놓이기 쉽지 않으니깐. 그러나 이 영화는 두 가지를 전부 지니고 있다. 그녀의 회고는 오직 그녀의 머릿속에만 있으니 이는 다분히 추상적이리라. 동시에 그 시절의 소피가 아닌 성인이 된 현재의 소피가 주체라는 점에서 그녀의 인생에서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읽히게 될 사건이다.
섬광처럼 점멸하는 검은 공간에서 마주한 아빠는 지금의 자신과 엇비슷한 나이대다. 하지만 이 타임라인은 성립할 수 없다. 이미 늙어버린, 혹은 사라져 버린 그 시절의 아빠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의 나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현실에서의 시공간적 제약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구축함으로써 영화라는 예술은 외연을 확대한다.
해당 장면은 보기에 상당히 불편한 편집으로 이루어져 있어 오직 추측으로 보아내게 한다. 마치 머이브리지의 활동사진을 연상케 하는 조각난 컷들이 수시로 점멸한다. 이는 영화의 중간중간 덩그러니 놓여 있다. 결국엔 몇 차례 반복을 거듭할수록 줄거리적 맥락을 벗어난다. 누군가의 머릿속 풍경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좀 더 확실하게는 관객의 추측에만 의존하는 추상적 시공간이라 그렇다. 그녀는 왜 그 시절의 아빠를 마주했을까. 이제는 성인이 된 그녀가 그에게 건네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오히려 스크린이 객석을 향해 묻고 있다.
유년 시절이라는 시간대는 인간의 생 위에서 특수성을 점유한다. 평생의 시기가 기인하는 찰나의 시절. 지금의 우리를 기쁘게 만든, 괴롭게 만든, 살아있게 만든 이 애증의 시절은 누구에게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소피는 최대한 객관적이기 위해 노력한다. 어른들의 놀이에 접근하고, 인생의 자유이용권을 수여받은 짧은 여행은 그녀에겐 오직 성장의 기간이었다. 그래서 고쳐 생각한다. 자신의 존재에 집중한 시간을 아빠를 위한 시간으로 돌려놓는다. 이전까지의 캘럼은 단지 나의 아빠로만 성립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아빠의 카펫을 밟고 깨어나 캠코더를 켠 지금의 소피에게는 캘럼이라는 한 인간이 더 중요하다. 최대한 나를 잠재우고 그동안 깨어있을 그를 상상한다.
영화 속에는 화자가 누군지를 파악한다면 성립하지 않을 장면이 몇 있다. 소피가 잠든 침대 너머로 창가에서 춤추는 캘럼을 찍은 POV, 벽을 등지고 잡지를 읽는 소피와 벽 너머 깁스를 푸는 캘럼을 함께 담은 아이레벨 투 숏, 생일축하와 디졸브 되는 대성통곡하는 캘럼의 뒷모습 등이 이에 속한다. 그 시절의 소피는 보지 못했을 아빠의 모습이 이 장면들엔 오히려 생생하게 담겨 있다. 감상주의를 벗어나 객관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소피는 이곳에 없는 아빠를 더욱 자세히 볼 수 있게 된다.
필름과 디지털을 교차하며 편집된 따뜻하지만 적적한 이 영상물은 느슨함의 미덕을 강조한다. 이야기의 완결성이 잘 보이지 않고 단숨에 읽히지 않아 답답하기까지 하다. 대신 느리게 자라나는 알쏭달쏭함이 이 영화엔 있다. 관객을 일종의 스토리텔러로 만들어 영화의 텍스트 바깥에 있는 이야기를 스스로 구축하게끔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를 본 관객은 긴 시간에 걸쳐 소피처럼 상상한다. 그때의 나를, 그때의 아빠를. 어쩌면 이 영화는 소피를 기다리던 캘럼의 캠코더처럼 줄곧 당신을 기다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