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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줄박이물돼지 Sep 04. 2020

딸랭구 키우기 #10

평범한 수준의 아빠 육아조차 고난의 행군일세

새벽 3시 30분에 잤다. 아침에 도저히 못 일어나고 뻗어있는데 딸랭구임이 분명한 손이 특정 신체 부위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부위로 말할 것 같으면 밤새 배출하지 못한 수분을 내보내기 위해 아침에 항상 발사 준비가 되어 있는 곳으로, 네 살짜리 꼬맹이가 움켜쥐기엔 몹시 민망한 곳이었다. 녀석이 다짜고짜 그렇게 나타나서 아빠 일어나 아침인데 왜 자고 있어 어쩌고 저쩌고 하길래 안아가지고 부비부비 좀 해줬더니 쫑알쫑알 좀 하다가 도망갔다. 너무 졸려서 의식이 가물가물해가지고 딸랭구가 뭐라 했는지는 기억 안 난다. 딸랭구 녀석이 요새 남녀의 차이에 대해 몹시 궁금해한다. 그저께도 할아버지 남자야? 꼬추있어? 물어봐서 난감했다. 이제 남녀의 차이를 알려줘야겠다 싶어서 뭐부터 알려줄까 생각했는데, 여자는 염색체가 XX고, 남자는 XY야. 이거밖에 생각이 안 났다. 고추 있고 없고로 나눌 수도 있지만, 실제론 없는 게 아니고 다른 건데 그걸 또 설명하려면 민망한 얘기가 길어질 것이고, 그렇다고 걍 유무로 나누자니 남성에 비해 여성이 뭔가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줄 것 같아서 싫었다. 질투할 수도 있잖아? 아빠는 있는데 왜 나는 없어? 이러고. 저번에도 느꼈지만, 성교육의 필요가 이렇게 일찍 다가올 줄 몰랐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됐다!


딸랭구가 나의 빠워 허그를 피해 도주한 이후 한참 의식이 끊겨 있다가 9시 반쯤 일어났다. 마누랭구 상태가 엄청 안 좋았다. 들어보니 딸랭구가 새벽에도 자주 깨고 최종적으로 7시쯤 일어나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날씨 화창했다. 계곡에 면한 야외 자리가 있는 카페나무 그늘 아래서 음료 한잔하면서 딸랭구랑 계곡서 물장구치고 놀려고 했다. 마누랭구는 영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정부에서 나가지 말라고 하는데 왜 자꾸 기어 나가려고 하냐, 몸도 안 좋은데 집에 있자. 평소 같았으면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을 텐데, 나가는 게 좋다는 직관적 판단만 되었고, 새벽 3시 반에 잠들고 중간에 한 번 성희롱적 기상까지 당한 터라 제대로 얘기 못했다. 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횡설수설했던 걸 복기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집에 있어도 어차피 애기를 돌봐야 하는데 집에서 놀아주는 게 밖에서 놀아주는 것보다 훨씬 어려워서 우리 컨디션 회복에 오히려 나쁨

2) 집에서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게 불가능하므로 낮잠을 재우기 힘들어짐. 낮잠이 꼬이면 우리 휴식도 힘들어짐

3) 오픈 시간 맞춰 야외에 자리 잡으면 타인과 접촉을 최소로 줄일 수 있고, 카페가 집에서 가깝기 때문에 예상과 달리 사람이 많은 경우 빠른 후퇴 가능


이 정도로 조리 있게 설명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횡설수설했더니 그저 바깥에 나가고 싶어서 환장한 놈처럼 보였다. 가는 길 내내 우리 부부의 표정은 찌무룩했다. 딸랭구만 신나서 옷도 알아서 다 찾아 입고 신발도 신고 현관에서 동동 뛰었다. 다행히 카페에 사람도 없고 야외라 볼 것도 많아서 딸랭구를 이끌고 근처 한 바퀴 돌았고, 마누랭구에게 절실했던 약간의 휴식을 줄 수 있었다. 카페에는 온실도 조그맣게 있었는데, 무화과도 있고 곤충 표본도 있었다. 표본의 벌레들 중 전갈을 꽤 마음에 들어해서 여러 번 봤다. 카페 옆 건물 근처의 조그만 텃밭에는 방울토마토, 블루베리, 참외가 있고 길 건너서는 고추랑 옥수수밭도 있어서 보여줄 게 많았다. 기대했던 계곡이 좀 아쉬웠다. 비로 물이 불어서 그나마 들어갈 만했지만, 물이 별로 없었으면 매우 구렸을 것이다. 카페에서 바로 내려가는 길도 없어서 아래쪽으로 빙 돌아갔다. 가는 길에 파리매 두 마리가 딸랭구 근처로 날아와서 애기가 기겁했다. 그때 내가 그 벌레들을 소등에(쇠파리)인 줄 착각하고, 호주 가서 등에한테 물려가지고 식겁했다는 얘기를 해줬다. 그게 인상 깊었는지, 길이 좀 험해서 안고 가자고 할 때마다, 여기는 등에가 나타나서 그렇지? 내가 아빠 안고 있다가 등에가 나타나면 저리 가! 한다면서 귀엽게 굴었다. 파리매나 소등에가 뭔지 좀 궁금하실 수도 있지만 가급적이면 찾아보지 않으시는 게 안구 및 정신 건강에 좋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곤충 이름 많이 까먹어서 도감 하나 사놓고 딸랭구랑 보고 싶다. 마누랭구가 보면 기겁할 테니까 내 방 구석에 꽂아놓고 주말에 벌레 잡으러 나가기 전후로 읽으면 좋을 듯.


신나게 놀고 와서 집에서 밥도 잘 먹고 잠도 아주 잘 잤다. 이렇게 열심히 놀아주면 날 향한 애정이 확실히 강해진다. 잠도 나랑 잔다고 해서, 케이크 만드는 책 한 권 읽어주고 티라노사우루스가 장봉도에서 모닥불 피워놓고 삼겹살 꼬치 구워 먹는 얘기 해줬다. 장봉도에 배 타고 들어가서 갯벌에서 조개 잡아서 해감하고 저녁에 모닥불 만들고 닭다리 꼬치 굽고 삼겹살 꼬치 굽는 얘기할 때쯤 애기가 잠들었다. 재우는 데 10분 정도 걸렸는데, 이 정도면 거의 마취총 쏜 거랑 다름없다. 그리고 나도 넘모 졸려서 옆에서 기절. 그동안 마누랭구는 쉬지도 못하고 집안일을 잔뜩 했다.


낮잠 자고 일어나서 저녁 전에 몸으로 좀 놀아주고, 저녁 먹고는 욕조에 물 받아놓고 놀았다. 어제 하루는 거의 놀아주기 전담반이었는데 무척 힘들었다. 마누랭구는 코로나가 많이 불안한 모양인지, 어린이집 보내지 말까 하길래 보내는 게 좋겠다고 했다. 밖에도 못 나가는데 혼자서 애기랑 놀아주려면 너무 힘들 것이다. 내가 출근하는 데 애기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는 게 무용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철저하게 하려면 우리 가족 모두 밖에 안 나가고 쿠팡에서 식재를 시켜 먹어야 한다. 그런 선택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선택의 자유가 필요한 시기다. 부에 대한 열망이 더더욱 절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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