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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줄박이물돼지 Sep 05. 2020

딸랭구 키우기 #12

평범한 수준의 아빠 육아조차 고난의 행군일세

어제는 장모님 오신다고 해서 육아 내팽개치고 꿀 좀 빨아보려고 벼르고 있었다. 몸은 퍼져 있었지만 맘은 의욕 충만했다. 퇴근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책상 위에 소설 한 권 펼쳐놓고,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나 켰다. 폰 게임 돌려놓고 영웅전설 4 이동시키다가 전투를 만나면 두 기계가 나 대신 게임하는 동안 소설 한 줄씩 읽었다. 하고 싶은 게 많은 남자의 꿀 빨기가 무엇인지 세상에 보여주었다. 그러고 있었는데 딸랭구를 재우러 들어간 마누랭구한테 전화 왔다. 심부름시킬 것이 있을 때 보통 전화하는데, 책을 한 권 더 가져다주거나 물을 한 잔 떠가면 해결되곤 했다. 그래서 하던 일들 마무리 않고 다 부려놓은 채로 호출에 응했는데 딸랭구가 나랑 자고 싶어 한단다. 우리 딸은 정말 불효왕이다. 불효왕. 아빠한테 이렇게 모처럼 기회가 났는데, 시간이 모자라서 세 가지 한꺼번에 하고 있었는데, 그걸 못하게 부르다니. 하지만 다짜고짜 꿀 빨려고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서 딸랭구를 곱게 인계받았다.

동침을 요구하는 딸랭구의 조건은 간단했다. 이야기를 해달라. 무슨 얘기 해줄까? 티라노가 삼겹살 꼬치 구워 먹은 얘기 해달라. 저번에 했던 얘기라 창작의 고통이 적게 드는 간단한 요구였다. 저번에 제대로 못 듣고 잠들더니, 아빠가 무슨 얘기 해줬냐는 엄마의 물음에 티라노가 삼계탕 먹는 얘기해 줬다고 말했단다. 이야기 제목을 엄마가 정정해 준 듯하다. 따님께서 원하시니 또 썰을 풀어드렸다. 티라노네 가족이 살았는데, 차를 타고 인천 항구에 갔어. 랭구 너 항구가 뭔지 알어? 알어. 넌 뭐 물어보면 다 안대? 항구는 배들이 모여있는 곳이야. 티라노 가족은 거기서 장봉도로 가는 여객선을 탔어. 여객선은 배를 출발하는 거야! 그래그래. 딸랭구는 잘 모르는데 중간중간 아는 척은 참 잘한다. 가끔은 정정해 주고 대부분 그냥 그러려니 넘어간다. 여객선은 승객들을 태우고 가는 배야. 아주 크다구. 보통 하얀색이고 승객들이 편안하게 탈 수 있어. 티라노네 가족은 여객선을 탔어. 티고(티라노네 가족의 4살짜리 애기 이름이다)는 갈매기들한테 새우깡을 하나 던져줬는데 갈매기가 끼룩끼룩 날아와서 공중에서 새우깡을 탁 채가는 거야. 티고는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자기는 하나도 안 먹고 갈매기들한테 새우깡을 다 줘 버렸어. 티고도 좀 먹어야지! 새우깡을 다 갈매기 줘버렸다는 대목에서 딸랭구 목소리가 안타까움에 격앙되었다. 엄마랑 아빠한테도 새우깡 나눠주고 사이좋게 먹어야지! 갈매기 다 주면 어떡해!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티고는 갈매기가 공중에서 새우깡을 휙휙 받아먹는 게 너무 재미있었대. 그래서 다 줘버렸지 뭐야. 섬에 도착한 티라노 가족은 펜션으로 갔어요. 펜션은 하얀색 나무 오두막이었어요. 펜션에는 아주 커다란 냄비가 있었는데 조개를 잡아서 해감할 때 쓰는 냄비였어요. 너 해감 알아? 응. 해감이 뭐냐면 갯벌에 사는 조개가 진흙을 뱉을 수 있게 바닷물에 넣어놓는 거야. 진흙은 깨끗하게 씻어서 먹어야 되지! 응. 그런데 조개가 뱃속에 진흙을 품고 있어서 바다에 있는 것처럼 해주어서 진흙을 뱉게 만들어 줘야 돼. 티고네 가족은 냄비에 바닷물을 잔뜩 받아놓고 갯벌에서 조개를 잡았어요. 조개를 많이 잡아서 해감을 해놓곤, 해변에 가서 모닥불을 만들었어요. 너 모닥불 뭔지 알아? 알아. 예쁜 불이야. 맞아. 하지만 모닥불도 불이라서 뜨거우니까 만지면 안 돼. 모닥불 만드는 법 알아? 알아. 물어보면 일단 다 안다고 하는 게 우리 딸랭구의 특기지만 뒷말이 달리지 않으면 전혀 모르는 다. 모닥불은 말이지, 먼저 나뭇가지를 기대어 쌓으면서 텐트 모양으로 만들어야 돼. 너 텐트 알아? 알아. 집처럼 짓는 거지? 오. 알고 있네? 나뭇가지를 텐트 모양으로 만든 다음에 중간에 마른 풀이랑 나뭇가지를 넣어서 불을 붙이면 공기가 잘 통해서 불이 잘 붙어. 그럼 그 불길이 나뭇가지로 옮겨 붙으면 모닥불이 되는 거야. 티고네 엄마는 감자를 잘 씻어서 은박지에 싼 다음 모닥불에 넣어두었어요. 그동안 티고네 아빠는 삼겹살을 꼬치에 끼웠어요. 그리고 닭다리도 꼬치에 끼워서 모닥불 주변에 꽂아두었죠. 지글지글 삼겹살이 익는 동안 수평선 너머로 해가 졌어요. 하늘이 온통 주황색이 되었어요. 그리고 어둠이 찾아오자 모닥불이 환하게 주변을 밝혀주었고 삼겹살과 닭 다리와 감자가 다 익어서 티고네 가족들은 맛있는 식사를 했답니다. 끝이야? 끝이야. 이제 자자. 아니야, 엄마는 이야기 두 개 해줘. 그럼 아빠도 두 개 해줘? 응. 냥이가 고기 구워 먹는 얘기해 줘. 우리 부부 애를 재울 때 이야기를 마구 지어내기 때문에 딸랭구가 해달라는 얘기가 도대체 뭔지 알 수 없다. 그럴 때 본인 맘대로 얘기가 진행되지 않으면 화내기 때문에 적당히 다른 얘기를 해야 한다. 내가 이 때를 위해 해감한 조개 얘기를 복선으로 깔았지! 후후후. 랭구야, 그럼 아빠가 티고네 가족들 자고 일어나서 놀았던 얘기 해줄까? 좋아! 해변에서 늦게까지 모닥불 옆에서 재미있게 놀았던 티고는 아침에 늦게 일어났어요. 일어나 보니 아빠가 해감된 조개를 가지고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고 있었어요. 조갯살을 깨끗하게 씻어가지고 올리브 오일을 두른 팬에 넣은 파스타였어요. 랭구야, 그 파스타를 봉골레라고 해. 저번에 언니가 해줬는데 랭구가 잘 먹었지? 응! 봉골레 최고! 예전에 처남네 놀러 갔을 때 처남댁이 봉골레를 해준 적이 있다. 그때 엄청 잘 먹더니 아직도 기억이 나는가부다. 격한 손동작으로 엄마도 아빠도 봉골레 좋아해. 봉골레 최고를 연발했다. 또 놀러 가서 먹자고 다짐다짐 받더니 다시 얘기를 들었다. 티고네 아빠가 봉골레를 하는 동안 티고네 엄마는 아가도 먹을 수 있는 하얀 국물의 라면을 끓이고 있었어. 그런데 티고가 보니까 조개 안에서 째끄만 꽃게가 나오는 거야. 그 꽃게는 몸통이 동그랗고 다리가 가느다란 녀석이었는데, 조개 속에서 살고 있는 종류의 게였어. 티고는 그 게 세 마리를 잡아서 엄마의 라면에 넣었지. 그랬더니 티고네 엄마가, 우리 티고가 게를 잡아넣어주어서 라면에 감칠맛이 살아났네 하고 칭찬해 주었어. 티고네 가족은 아침으로 봉골레랑 라면을 맛있게 먹고 집에 돌아가기로 했어. 집에 벌써 가? 응. 티고네 아빠는 출근해야 돼서 집에 가야 돼.

흡족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더니 딸랭구가 이제 자자! 하고 휙 누웠다. 그렇지만 쉽게 잠들지 못하고 꿈시럭대더니 엄마랑 할머니랑 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한 다리 끼고 싶은 모양이었다. 바깥에 나간다고 난리 치기 전에 미리미리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또 이빨을 털기 시작했다. 엄마랑 할머니랑 오랜만에 만나서 할 얘기가 많을 거야. 할머니는 엄마의 뭐지? 했더니 엄마의 엄마란다. 몇 번 교육한 보람이 있군. 그 김에 아빠 엄마의 출생의 비밀을 얘기해줬다. 랭구야, 들어봐. 엄마의 엄마는 할머니야. 그럼 아빠의 엄마는 누구지? 마누라야. 아니야. 그건 아빠가 엄마를 부를 때 하는 말이고 아빠의 엄마도 할머니야. 그래서 넌 할머니가 둘이란다! 한 가지 더 알려줄게. 할아버지는 엄마의 아빠야. 그런데 아빠의 아빠도 할아버지야. 그래서 넌 할아버지도 둘이지! 명확하게 알아듣는 느낌은 전혀 없었지만 혼을 쏙 빼놓는덴 성공했다. 뜨뜻한 머리통이 겨드랑이께에서 딩굴거리는 느낌이 참 좋았다. 그러다 같이 잠들어 버렸다.

느지막이 일어나 보니 나 없이 멍 때리고 있는 게임들이 보기 싫어서 다 지워버렸다. 게임할 시간에 플랭크나 30초 할걸. 게임하지 않는 삶으로 돌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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