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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줄박이물돼지 Sep 08. 2020

딸랭구 키우기 #13

딸랭구는 아빠 겉모습을 중요하게 여긴다

장모님이 계속 계셔서 육아도 계속 꿀 빨고 있었다. 저녁 먹고 장모님이 애기를 데리고 나가셨다. 그때를 틈타 머리카락을 좀 잘랐다. 미용실은 돈도 비싸고 시국이 찝찝해서 개기고 있었더니 아주 귀찮을 정도로 머리가 길었다. 딸랭구 머리를 자르려고 사둔 숱가위가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숱가위로 탁탁 자르면 볼륨을 적당히 부여해 주면서 길이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주식을 잔뜩 손절하면 무모함과 단호함으로 머리카락을 쳐냈다. 잘린 머리카락들이 욕조 안으로 후드드득 떨어졌다. 하하하 이제 좀 시원한걸? 싶을 정도로 잘랐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웃긴 녀석이 되어 있었다. 마누랭구는 나름 괜찮다고 했다. 우리 마누랭구는 아주 특이한 취향을 지니고 있다. 70년대 시골 소년처럼 머리 자르면 그렇게 좋아한다. 바가지 머리를 만든 다음 숱가위를 이용해서 잔머리마저 정리 안 되게 삐쭉 삐죽 삐져나온 머리다. 내 머리가 딱 그 상태였다. 대중의 용납을 받기 힘든 상태였다. 할머니와 산책을 끝내고 돌아온 딸에게 물었다. 아빠 머리 어때? 아빠 머리 못생겼어! 하고 울었다. 야! 아무리 못생겨도 그렇지, 울 것 까진 없잖아! 저번에 미용실에서 머리 좀 망하고 돌아왔더니 아빠 머리 좀 봐! 너무 웃겨! 하고 깔깔 웃었는데, 이번에는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참담한 상태였나부다. 하지만 나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회사에 머리를 이따위로 하고 갈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쾌감을 느꼈다. 다니기 싫다는 마음을 머리카락으로 표현했다. 그런 의미에서 면도도 대충대충 하고 다닌다. 내 수염은 하도 빨리 길어가지고, 아침에 수염을 맨송맨송 깎아놓으면 저녁이 채 되기 전에 턱과 코밑에 철 가루가 잔뜩 뿌려지고, 3일이 지나면 얼굴 하부 1/3 면적에 잔디밭이 형성되며, 7일이 지나면 갈대밭 수준으로 성장한다. 어제 갈대밭 상태로 출근했더니 만나는 사람들이 모조리 야인 같다고 했다. 윤택이랑 자연인이다 나갈 건지 물어보는 친구도 있었다. 겨우 일주일 수염 방치했다고 별 얘기를 다 들었으니 꾸미지 않은 효과를 제대로 누린 셈이다. 겉모습은 매우 중요하지만, 내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지 관심 갖지 않는다. 나의 내재가치는 그들의 시선에 좌우되지 않는다. 내가 신경 쓰는 이들은 행색을 보고 날 평가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어차피 사람들은 타인을 제대로 모른다. 자유롭게 뻗친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으로 출근하는 나를 보노라면, 저 남자가 사무실에서 믹스 커피 대신 연한 국방색 포트넘 앤 메이슨 아쌈 틴에 든 홍차를 우려 마신다고는 절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책상 위 틴을 보노라면 홍차에 조예가 깊은 인간인가 싶겠지만, 그런 우아한 틴에 든 찻잎을 종이컵에 담뱃재 털듯 대충 털어 넣고 뜨신 정수기 물에 우려서 앞니를 필터 삼아 마시는 꼬라지를 보면 티 인퓨저라는 문명도 접해본 적 없는 미개인처럼 보이겠지. 그런 홍차알못 미개인이 마시는 차가 사실은 흔히 구할 수 있는 포트넘 앤 메이슨 아쌈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듣도 보도 못했을 기다파르 다원의 세컨드 플러쉬 다질링이라는 사실도 짐작 못할 것이다. 근데 또 그 와중에 포트넘 앤 메이슨을 오지게 좋아해서 청첩장을 그 회사 틴 모양으로 주문 제작한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신혼땐 포트넘 앤 메이슨이 집에 이렇게 많았다

사람들이 타인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몹시 기껍다. 필요한 경우에만 껍데기를 꾸미면서 살아도 되니까. 딸랭구야, 아빠가 비록 평소 겉모습은 후질지언정, 네 친구들 앞에서 네게 창피 주는 아빠가 되지는 않을 거야. 네 친구들이 멋진 아빠를 두었다고 다들 부러워할 수 있도록 살 거야. 필요한 경우엔 뱃살 없는 몸으로 수트를 차려입고 인자한 미소로 넉넉하게 용돈 주는 아빠가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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