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던 회사 일 때문인지, 마누랭구가 딸랭구 재우러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누웠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잠들기 전까진 최선을 다하여 놀아주었다. 그 와중에 정신 상태는 메롱이라서, 레고를 하면서 이깟 플라스틱 사출물 맞추기가 재밌는 이유가 뭘까? 딸랭구도 재밌고, 나도 재밌네. 레고에 사업적 해자가 있는가? 왜 사람들은 중국산을 두고 더럽게 비싼 레고를 살까? 역시나 신뢰의 문제인가? 블록 간 공차 관리와 우수한 조립성을 확보하는 노하우는 무엇일까? 생각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애 키우는 게 뮤지컬 연출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핵뜬금없네.
뜬금없는 생각의 고리를 지금이라도 끼워 맞추자면, 레고는 부속품 가지고 완성품을 만드는 놀이다. 부속과 시간이 충분하다면 완성품의 모습은 만드는 사람 의도대로 나온다. 반면 육아는 그렇지 않다. 내가 바라는 인물상을 위해 딸랭구의 일상을 레고처럼 짜 맞추면 안 된다. 예를 들어 피아노를 세미프로급으로 치고, 아이즈원 Fiesta 커버 댄스를 출 수 있으며, 격일로 운동하며 3대 300을 치고, 20대에 본인의 업을 시작해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아빠와 엄마를 매주 힙한 카페에 데리고 가는 딸랭구를 갖고 싶다고 하자. 그렇다고 피아노를 가르치고, 댄스와 발레 학원에 보내고, PT를 시키고, 학원 뺑뺑이를 돌리고, 직업체험시키는 등등의 활동으로는 저런 아이를 키워낼 수 없다. 사실 그 어떤 방법을 써도 저런 아이가 나올 거란 보장이 없다. 본인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물상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아이가 완성한 인물상과 부모가 원하는 인물상이 최대한 일치하도록 장려하는 일이 육아다. 공연계에서는 이와 비슷한 작업을 연출이라 부른다. 레미제라블 연출하며 마리우스가 총 맞은 에포닌과 노래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오열하긴 원한다고 하자. 슬프고 안타깝고 어쩌고 저쩌고 복합적인 감정을 보여줘야 한다. 노래가 시작하고 1:31쯤에 1.3초간 하늘을 보며 눈물 참고, 1초 정도 들여서 에포닌 얼굴로 시선을 떨군 다음 입꼬리를 떨어트리면 뒤지게 슬퍼 보일 수 있어. 이딴 식으론 절대 불가능하다. 배우들이 본인 안의 어떤 점을 끄집어내어 연기에 몰입하되, 관객들도 알아차릴 수 있도록 표현하게끔 해줘야 한다. 육아와 연출 모두 대상의 내면을 자극해서 바라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정말 비슷하다. Little fall of rain 얘기하니까 예전에 우리 딸랭구 안고 재울 때 많이 부르던 게 생각나네. 선율이 조용하고 슬퍼서 그런지 자장가로 잘 통했다. 괜찮아. 우리 랭구. 무섭지 않은걸.
식당에서 잠든 딸랭구에게 노래를 불러주며 숙소로 옮기는 중
생각난 김에 연출할 때를 떠올렸더니 육아랑 소름 돋게 비슷한 점을 또 찾았다. 배우들은 대부분 말을 뒤지게 안 듣는다. 뭐 시키면 제대로 하는 꼴을 보기 힘들다. 우리 딸랭구랑 비슷하다. 대체 뭔 생각인지 무척 궁금하게 만든다. 배우들은 각자 말 안 듣는 이유가 있다. 주연을 맡은 배우들부터 앙상블을 맡은 배우들까지, 각기 다른 이유로 말 안 듣는다. 우리 딸도 아마 매번 다른 이유로 말을 안 듣겠지. 배우들이 내 말을 듣게 하려면 마음으로 감복시켜야 한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게, 저 양반이 날 위해서 신경 쓰고 노력한다고 느끼게 해줘야 한다. 거기에 더해서 나 자신의 행실도 아주 중요하고, 그들이 원하고 궁금한 것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애써서 연출이 원하는 방향을 따르게 된 배우들은 기적적인 결과를 안겨준다. 연출은 공연의 전체적인 그림은 상상할 수 있지만, 배우 개개인이 어느 정도까지 퍼포먼스를 낼지는 완벽히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무대의 가호를 받은 배우들은 내 예측보다 훨씬 뛰어나다. 공연 전체 그림을 짜놓고 오랜 기간 연습시킨 사람마저도 믿기 힘든 수준의 미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땐 고생했던 일들이 싹 잊히고 보람과 자부심에 기분이 째진다. 우리 딸랭구 키우면서도 비슷한 경험 자주 하면 좋겠다. 그리고 나중에 딸랭구가 본인 인생의 무대에 제대로 올라갔을 때 아빠랑 엄마한테 많이 고마워할 수 있도록 키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