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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줄박이물돼지 Sep 11. 2020

딸랭구 키우기 #17

딸랭구랑 달리기

저녁에는 가족 모두와 산책을 나갔다. 딸랭구의 체력을 소모시키면서 와인을 사려는 목적이었다. 딸랭구는 조금 가다가 힘들다고 안아달라고 했다. 지난 주말 호수 공원에 다녀오기 전까지 우리 마누랭구는 딸랭구의 가증스러운 연기에 속아 자주 업어주었다. 그러나 아빠와 함께 호수 주변 2km가 넘는 거리를 뛰어다니던 딸랭구를 보며 여태 그 모든 게 연기였다는 걸 알아챘지. 어제도 업어주지 않고 내게 트레이닝을 맡겼다. 요새 우리 딸은 시합하는 걸 좋아하는데, 멀리 뛰어갔다 엄마한테 돌아가는 코스로 시합을 반복했다. 이 방법으로 총 2km 정도의 산책을 3km 정도의 왕복 달리기로 전환시켜 딸랭구의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소모시켰다. 이 방법의 유일한 단점은 누군가 같이 뛰어야 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나라는 점이다. 은근히 힘들었지만 축적된 지방을 조금이나마 태운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달렸다. 같이 뛰면서 아빠에 대한 애정이 강해졌는지, 집에 와서는 아빠랑 샤워한다고 날 끌고 들어갔다. 요새 젊은이들이 주말에 우르르 모여서 달리기 하는 이유를 조금 짐작할 수 있었다.


근래 와인 몇 병을 맛있게 먹고, 내 미각에는 대충 아무 와인이나 괜찮으니 싼 거 사서 가끔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동네 와인샵을 추천받았다. 싼 와인은 편의점이나 마트에서만 살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저 와인샵에는 2만원 이하의 와인이 제법 있었다. 비비노 앱을 켜서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평점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걍 사장님께 추천을 부탁드렸는데 두 종류의 와인을 추천해 주셨다. 칠레랑 미국 와인을 추천하셨다. 포도 품종에 대해서 막 물어보다가 갑자기 미국 와인이 땡겨서 덜컥 샀다. 비비노 평점도 사진 찍어본 것들 중에선 았다. 집에 와서 마셔보니 우리 부부 취향에 굉장히 잘 맞았다. 묵직한 바디감에 한줄기 단맛이 보태어져, 커피로 따지면 찐한 에스프레소 투 샷 넣은 라떼에 시럽 조금 짜넣은 느낌을 주었다. 이렇게 맛있는 와인이 있다니 최고다! 품종이 뭘까 하고 봤더니 Blend였다. 진또배기 와인은 단일 품종 포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어렴풋한 선입견을 파괴해 주었다. 아님 내가 아주 좋은 와인이 필요 없는 편안한 입을 가진듯하다.


딸랭구 재우고 마누랭구랑 와인 마시면서 금쪽같은 내 새끼를 봤다. 이 프로그램은 도움되는데 보기 싫다. 난 성격이 급해서 긴 영상 보는 걸 싫어한다. 심지어 요샌 집중력도 떨어져서 더더욱 힘들어졌다. 게다가 이 프로그램을 보면 애기가 막 울고불고 떼쓰며 빌런처럼 나오는데, 까 보면 다 부모 잘못이다. 그렇다면 문제 상황을 대충 보여주고 솔루션 부분을 좀 더 자세하게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다큐가 아니고 예능이다 보니 후반의 사이다를 위해 전반의 고구마를 더 열심히 보여준다. 그래서 와인 반 잔 먹고 방으로 도망쳐서 아이즈원 봤다. 끝날 때쯤 갔더니 마누랭구가 앵앵 울고 있었다. 딸랭구한테 못 해준 게 생각나고 우는 아가를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한다. 마누랭구가 내용 요약해 주길래 개이득이다 생각했는데, 우리 마누랭구는 출연하는 아가들과 부모들의 미묘한 감정과 반응들을 다 봐야 한다며 혼냈다. 바로 그 부분이 보기 싫은 건데! 그냥 문제랑 정답만 알고 싶다. 날로 먹고 싶다! 하지만, 애기 키우다 보면 부부 시간을 내기 점점 어려워지고, 그러다 보면 육아 리뷰가 적어진다. 부부 사이의 육아 리뷰는 꼭 필요하다. 잦으면 잦을수록 좋다. 보기 싫지만 와인을 벗 삼아 금쪽이 보고 배우며 우리 육아 리뷰하는 시간을 좀 확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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