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랭구 키우기 #15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
아침에 호수공원에 갔다. 집에만 있으려니 장모님과 애기가 너무 답답해했다. 날이 쨍쨍했으면 엄두를 못 냈을 텐데 다행히 날씨가 침침했다. 그래도 마스크 끼고 걷기엔 숨이 답답한 날씨였다. 1시간 동안 딸랭구한테 사마귀도 잡아주고, 땅메뚜기도 잡아주고, 콩깍지도 여럿 따주고, 자연학습을 열심히 시켜주었다.
근래 장모님의 은총으로 육아 참여가 적었다. 오늘 밤엔 꼭 내가 딸랭구를 재우고자 마음먹었다. 사탕발림을 열심히 하여 나랑 잔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결국 말을 바꾸어 엄마랑 잔다고 했다. 자기 전에 읽어주는 책들과 창의력을 발휘한 이야기들 없이도 엄마랑 즉각적으로 잔다고 약속하길래, 조건에 합의하고 음식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유튜브나 봐야겠다고 집에 돌아왔는데, 마누랭구가 싱글벙글 웃으며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랑 책 읽고 잔대! 책 두 권을 들고 딸랭구가 기다리는 방에 들어가면서 나직하게 한 마디 했다.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 딸랭구가 진심으로 나랑 자고 싶었던 게 아니다. 딸랭구는 책 읽어준 아빠를 토사구팽하고 엄마를 들여서 이야기해달라고 생떼 부릴 계획이었을 것이다. 책 두 권을 읽어주자, 한 권 더 읽어달라고 얘기했다. 원래 마누랭구는 그때 한 권을 더 읽어주는데, 난 단호하게 짤랐다. 두 권만 읽기로 약속했으니 안돼. 그랬더니 물을 마시고 싶다고 했다. 저번에는 여기서 굴복하고 물 가지러 나갔다가 엄마를 데리고 들어왔다. 나는 그날의 교훈을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해도 들어주지 않는다로 결론지었고, 우리 마누랭구는 밖에서 얼른 물을 가져다주어야 된다로 결론 낸 듯싶다. 마누랭구가 얼른 물을 가져다주었다. 당연하게도, 물 마시고는 엄마랑 자고 싶다고 생떼 부리기 시작했다. 엄마를 찾는 요구는 물 마시겠다고 할 때보다 매우 거셌다. 바깥에서 듣기에도 굉장한 난리였을 것이다. 마누랭구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시위에 굴복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애기가 막 울면서 엄마를 찾는 걸 들으면 마음이 찢어진다. 그러나 테러리스트의 요구를 들어주면 더 큰 마음의 테러로 보답하기 마련이다. 꾹 참고 유화책과 강경책을 동시에 사용하면서 옆에 눕히는 데 성공했다. 딸랭구 아빠랑 잔다고 약속한 거 지켜줘서 고마워 사랑해 우쭈쭈 해준 다음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혼을 빼놓았다. 콜로라도에 사는 새끼 사자 심바가 동물원에서 탈출해서 옐로스톤 국립공원 가는 이야기였다. 그다음에 무슨 이야기해줄까 물어봤더니 티고가 섬에 가서 삼겹살 구워 먹는 이야기 해달라고 했다. 또 해줘? 했더니 아빠랑 잘 때는 언제나 해달라고 하길래 저번보다 더더욱 살을 붙이고, 혹평을 받았던 갈매기가 새우깡 다 먹었다는 파트를 티고와 아빠와 엄마가 먹은 다음 줬다는 내용으로 수정했다. 이야기를 다 해주고 작은 소리로 엄마랑 자고 싶었다 어쩌고 구시렁거리는 걸 애써 무시했더니 이내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