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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줄박이물돼지 Sep 24. 2020

사씨임장기 #7

폭우를 뚫고 돌아본 곳에서 답을 잃다

"소생의 모친께서는 종교가 없으시지만, 부동산에 있어 단 한 가지 맹목적으로 신봉하시는 것이 있소."

"학군인가요?"

"아니오. '대단지'라는 것이오. 모친께서는 천 세대 이하 아파트 단지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시며 항상 소생에게 대단지... 대단지로 가야 한다 말씀하셨소. 그런 모친께서 수지의 대단지 중 하나인 신봉 1차를 적극 추천하신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소."


사씨와 부인은 하천에서 올라와 신리초교 삼거리에 서 있었다. 엘지 자이 1차의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했다. 조금 더 가면 되었지만, 사씨의 부인은 별로 내키지 않는 듯했다.


"신봉 1단지는 33평의 아파트를 3억 후반에 살 수 있는 어처구니없는 가성비를 지닌 곳이오. 소생의 계산에 따르면 삶의 쾌적함을 확보하면서 주식을 모으기에 최적인 곳이오. 가격이 전혀 오르지 않아도 상관없소."

"당신은 주식을 하기 위해 부동산을 돌아보나요?"

"그렇소. 목동을 포기한 이상, 부동산은 그저 값싼 레버리지를 위한 수단일 뿐이오. 사씨임장기#2에서 결심했소. 이제부턴 정말 딸라 자산뿐이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는 비가 오기 시작했으니 나중에 둘러보기로 해요."


멀리서나마 모습을 확인했고, 지하철역에서 걸어 다니기에는 조금 힘들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사씨 부부는 미련 없이 성복동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는 길에 깔끔하게 도색된 아파트들이 보였다.


"여기는 보기에 아주 좋은데 왜 후보로 고려하지 않으셨나요?"

"여기 신봉 우남퍼스트빌은 30평대가 없소."

"어느 하나 쏙 마음에 드는 집을 찾기가 너무 힘들군요."

"계속 다니다 보면 맘에 꼭 맞는 집이 나타난다고 했소. 그때까지 힘을 내봅시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 부부의 우산을 성대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 기세는 부부의 대화를 묻어버릴 정도로 장하였다. 성복역 쪽으로 넘어가는 길은 얕은 언덕이었다. 신봉 파출소 앞 버스 정류장에는 성복역으로 넘어가려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가 금방 도착하긴 했지만, 장대한 빗줄기 속에서 우산을 접어가며 조그만 마을버스에 오르는 일은 번다할 수밖에 없었다. 사씨 부부는 두 손으로 우산을 꼭 쥐고 그 옆을 지나쳐 걸었다. 그쯤에서 보일 거라 생각했던 이편한(利便閑)의 웅장한 모습도 정평공원과 빗줄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길 건너에 있는 태영데시앙을 보기 위해 부득이하게 도보 이동을 선택했는데 비가 이리도 많이 올 줄은 몰랐소."


언덕을 넘어가자 태영데시앙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퍼붓던 빗줄기도 그새 다소 약해졌다.


"초등학교를 품고 있지 않다는 점을 제외하면 태영데시앙은 이편한(利便閑)보다 오히려 좋은 입지에 위치하고 있소. 초등학교까지도 큰길 건너는 일 없이 이편한의 단지 내로 이동이 가능하므로 큰 결점이라 보기 어렵소. 곧 오픈할 성복 노대몰(勞大沒)과 지하철역이 오히려 가깝소. 이편한과 금노대성(金勞大城, 롯데캐슬 골드)이 오르면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단지요."

"겉보기에도 오래된 느낌이 별로 없고 깔끔하네요."

"수지 구축 중에서는 드물게 지하주차장이 연결되어 있고 다른 단지들에 비해 비교적 최근에 지어져 준신축으로 불리고 있소. 다만, 가격이 다소 부담이오."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푸른마을 푸르지오는 더 비싸지 않나요?"

"절대적인 가격은 그렇지만 평단가는 낮소. 그곳 역시 지하주차장이 연결되어 있고 주차 대수가 무척 여유롭소. 길 건너는 일 없이 초등학교까지 도보 이동 가능하고 인근의 성복중, 홍천중은 이현중과 비견되기도 하는 명문이오. 수지에 재건축이 일어나려면 상당히 기다려야겠지만, 용적률 180%는 든든한 보험이오. 언덕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가격이 아니었을 것이오."

"43평이면 너무 크지 않나요?"

"집과 티비는 대대익선(大大益善)이라 했소."


푸른마을 푸르지오로 올라가는 길은 자못 가팔랐지만 일단 오르고 나서는 크게 힘들지 않았다. 단지 내는 조용하고 사람이 없었다. 숲세권 특유의 맑은 공기와 건물이 높지 않은 점은 마음에 들었지만,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사씨 부인은 단지를 둘러보는 내내 말이 없었다. 사씨가 부인의 눈치를 살살 보는 와중에 사씨 부인이 확정적인 어투로 선고했다.


"어린이집이 없네요. 여기는 안 되겠어요."


푸른마을 푸르지오는 사씨가 중시하는 교통, 학군, 통근, 남향, 주차를 모두 만족하는 단지였지만, 당장 중요한 어린이집이 없었다. 사씨는 그동안 부동산을 알아보던 기준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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