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오렌지를 위한 사랑17
디오스 트라다 페로 노 올비다
-서른네 번째 날-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희망도 있을 수 없죠.”
내 이야기를 듣던 하얀 가운의 여자가 달래듯이 위로한다.
그 말이 어렵다고 하자
“망각을 못하는 사람은 기억이란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는 소화불량환자와 같단 얘기에요.”하고
자상하게 가르쳐준다.
나는 소화가 너무 잘 돼서 아픈 거라고 대꾸한다.
여자가 왜 말도 안 되는 억지소릴 그렇게 하냐고 핀잔이다.
그래서 되묻는다.
“구름도 달도 바람도 없이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까만 하늘을 본 적 있나요?”
여자가 싱겁게 웃는다.
“그럴 일은 없죠.”
난 씁쓸해서 웃는다.
“아내의 눈에 비친 하늘이 그렇답니다.
기억 하나 보이지 않는 까만 망각,
그게 아파요.”
-서른다섯 번째 날-
수사관이 수일 내로 출국조치를 취할 예정이라고 통보해 왔다.
정신 감정 결과, 정신 이상 상태에서 배우자에 대한 존속유기와 자살방조를 시도한 것으로 보고
본국 송환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드리드 공항에서 파견 수사관과 의료진이 직접 아내와 나의 신병을 인도해 갈 거라고 귀띔도 해 주었다.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인연인데 무슨 할 말이 있으면 하시구려.”
주름살이 깊게 패인 수사관의 눈가엔 동정 어린 우수가 배어 있다.
“신부님을 만나고 싶군요. 14일 전,
내가 체포되었던 산타마리아 시토 수도원에 계시는…….”
“혼인성사를 집전하셨다죠?”
나는 그냥 오도카니 있었다.
-서른여섯 번째 날-
하얀 면사포와 노란 프리지어 한 다발,
그것만으로 아내는 화사했다.
네이비색 바탕의 흰 꽃무늬 블라우스에 베이지 톤의 주름진 스커트를 입은 혜인과
감색의 블레이저 재킷이 어색한 한 남자가 결혼했다.
우리는 황토 빛 벽돌의 반원형 감실에 놓인 재단 앞에서 서약을 했고,
후드가 달린 갈색 카울을 두른 수사 신부는 신의 이름으로 축복을 했다.
“디오스 트라다 페로 노 올비다!
하느님은 지체하실지라도 잊지는 않으십니다.
사랑을 아는 이만이 그 진리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