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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Nov 12. 2021

방황

쓰고도 모를 이야기



58日






나는 말과 글이 있는 문명세계에 사는 인간이기에 언어학자 소쉬르의 언어관을, 철학을 좋아한다. 개념이 먼저 생기고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이름을 먼저 붙이면서 인간의 사고 속에 개념이 자리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꽃이 있어서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불러주자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처럼 언어가 만드는 세상을 지지한다. 그러기에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언어의 체계 속에 사는 나로서는 그에서 파생된 구조주의가 상식이 된 사회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편 언어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면 무서워진다. 이름이 입혀지는 것들에 계급과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부여받은 것들은 자리를 선점하고 오래도록 가진 자로 쥔 것을 내어놓지 않는다. 이름표는 경험적인 것들에도, 선험적인 능력에도 들러붙어있다. 의문이 드는 것은 선험적 인식에 대한 부분이다. 언어로 구분을 할 수 있기에 철학과 종교가 사회 안에 존재할 수 있지만 선험적 능력은 언어로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름을 먼저 붙여 개념화시키는 순간 그것은 경험으로 추락하는 느낌이다.



 또한 사랑, 자비 같은 추상적인 단어에 담기지 못하는 의미의 깊이와 두께와 맛을 표현할  없을 , 나는 좌절한다. 언어에 대한 일부의 불신,  언어적 능력의 한계를 느꼈기에 오히려 표현할  없는 경지에 그토록 기웃거렸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하는 .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지만 어떤 이에게만은 오롯이 전해지는  무엇. 염화시중의 미소로 전해지는 메커니즘. 그러나 그것 역시 깨달을 수는 없었다.   모두에 대한 무능감에 나는 또다시 좌절한다.



언어는 왜곡할 수 있지만, 언어가 없으면 막막하고 오해가 생긴다. 늘 어딘가 하나 풀리지 않은 듯 찝찝한 기분이다.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데 언어로도, 마음으로도 모두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 나는 구조주의와 염화미소 사이의 어디쯤에서 방황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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