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日
차茶살림학을 가르쳐주시는 스승님이 지난 수업 중에도, 이번 수업 중에도 물으셨다.
“넌 1953년에 뭐 하고 있었노?”
1953년이라면 지금의 내가 태어나기 이전이라는 걸 아시는 스승님께서는 왜 나에게 두 번이나 이런 질문을 하신 걸까? 단지 나의 순발력을 테스트해보실 요량이셨을까. 질문을 가벼이 여길 수 없었던 나는 처음에는 잘 모르겠다고 하고 이번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잘 모르겠다는 것과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53년에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답이었다.
요즘 물리학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철저히 문과였던 나는 철학, 심리, 종교 부분에 특히 관심이 많던 사람이었다. 오랜 기간 책을 보고 생각을 하며 느낀 것은 이 분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물리학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F=ma만 외우게 할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를 원자가 구성하고 있고 모든 현상은 운동으로 이해되고, 미분은 우주를 기술하는 법이고 적분은 우주의 정보를 알아내는 방법이라고 설명해주시는 선생님이 단 한 분만이라도 계셨더라면 나는 학창 시절에 물리와 수학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과 종교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다. 그것들은 나름의 관점을 바탕으로 증명할 수 없는 세상을 그려내고 예측한다. 탄생 이전과 죽음 이후의 세상은 종교에서는 신이라는 서사를 통한 믿음의 영역이고, 과학에서도 측정, 증명은 불가하지만 추론을 통한 예상의 영역이다. 어찌 보면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건 어느 쪽에서 봐도 1953년의 나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는 것이다.
과학으로 보자면 내 몸의 주를 이루는 탄소, 수소, 산소, 인 등으로 존재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질량 보존의 법칙에 의해 나는 미세하게 부서져있을지언정 총량은 같게끔 세상에 흩뿌려져 있었을 것이다.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에 있을 수도 있다. 종교로 보자면 지금의 전생을 살고 있을지도, 혹은 신이 아직 내보내지 않은 의지였을 수도 있다.
세상을 어느 관점으로 보든 나는 이 질문의 의의를 다시금 생각해봤다. 차살림학은 세상의 모든 것들과 어울려 사는 것에 대한 철학이다. 그러므로 ‘관계’가 핵심이다. 1953년의 나는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는 인간은 아니었어도 어딘가에 생명으로 있었을 것이다. 어느 시점이었든 언제나 이 세상을 구성하고 관계를 맺고 있었을 존재로서의 내게 스승님은 터전이 되는 세상에 대한 책임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건 아닐까.
‘그래, 1953년은 기억이 안 난다고 치자.
지금 넌 뭐 하고 있는데?
2200년에는 뭐 하고 있을 건데?
세상에 네가 해줄 수 있는 게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