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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Aug 23. 2021

카르마



“자기는 보면 극과 극을 달릴 때가 있어. 어쩜 저렇게 잘해줄까 하다가 아니야, 됐어. 할 때 하윤이 표정 보면 어찌해얄 지를 모르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 자기는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나을 것 같아.”



남편의 말을 듣고 나는 하루를 꼬박 침잠했다.



날카로운 말에 아이의 눈망울이 둘 곳을 모르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그려보니, 가슴이 욱신하다. 5살의 나이에도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고, 기민한 아이. 뒤돌아있는 아이의 작은 어깨가 더 작아 보인다. 하윤아-. 하윤아. 하고 이름을 부르자, 나를 향해 돌아서는 얼굴은-아이가 아니다. 어린 나다.



아이 외할머니, 나의 엄마는 예술가로 불린다. 예술가는 감각을 늘 벼리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세계를 예민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춤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표출하는 것들에 희로애락으로 녹여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가끔 엄마의 예리하고 변화무쌍한 감정이 일상에 날카롭게 파고들 때, 곁에 있는 가족은 아프고, 외롭다.



나는 유리나 페트병을 들어 올릴 때, 절대로 뚜껑 부분을 잡지 않는다.

5학년 때쯤이었나. 엄마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계셨고, 나는 음료수나 마셔볼 요량으로 냉장고 문에서 델몬트 오렌지주스를 꺼내려했다. 유리병이라 무게도 있고, 두툼한 두께가 13살 손아귀에 쉽게 들어오지 않아, 자연스레 뚜껑 부분을 집어 올렸다. 그 순간, 덜 닫혀있던 뚜껑이, 가득 찬 유리병 무게에 의해 열려버렸고 유리병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샛노란 오렌지 주스가 냉장고 아래쪽으로 꾸역꾸역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 손에 뚜껑만 쥐어든 채 멍하니 서있는데 엄마의 첫마디는 ‘괜찮니-?’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엄마가 당시 내게 전한 말이나 눈빛은 기억에서 지웠지만, 나를 심리적으로 압도했던 그 하루, 그 한순간의 서늘한 분위기는 여전히 생생하다. 나는 너무 미안했고, 슬펐고, 내가 쓸모없게 느껴졌다.



기억은 단순히 사건의 발생 때문이 아니라 좋게든 싫게든 마음에 나는 스크래치 때문에 새겨진다. 기억창고 데이터들이 쌓이면서 나는 긴장이 높은 사람이 되었다. 타인의 기분, 생각을 재빠르게 파악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느라 오래도록 내면의 나를 돌볼 시간이 적었다. 모든 방면에 능력치를 가지려는 욕구가 커졌고,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로 인해 누군가 슬프고 아픈 게 싫어서 선한 미소와 넉살로 포장했지만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순간순간은 도전이었다.



주변 사람들을 유난히 배려하고, 눈치가 빠른 내 아이에게서 문득 나를 발견하면 소스라치게 놀란다. 나는 나의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고, 아이는 나를 닮아가고 있었다. 기질적인 부분인가 의심하면서도 나의 말과 행동을 되돌아볼 때면 가슴이 철렁하다. 부러 씩씩한 척, 괜찮은 척하는 아이를 마주치는 날이면, 늦은 밤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하다, 미안하다.’ 말한다. 어린 아들도 혹시 나와 같은 기억을 갖게 되는 건 아닐까. 무의식에 깊게 박힐 만큼 강렬한 한 순간의 온도차를 아이도 느낀 적이 있을까...? 모든 엄마는 아이가 태양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란다. 날 선 차가움이 닿아도 개의치 않는 막강한 따뜻함을 가진 사람이 되길 원한다. 나를 닮은 아이의 미소가 진실하고, 나보다 더 밝게 빛나기를 소망한다.



카르마는 관성이다. 보아온 것, 느껴온 것이 원치 않게 체득이 되고 회피하고 싶지만 아니 철저히 반대로 하고 싶지만 나도 모르게 원치 않는 것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어린 시절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이 카르마를 끊고자 한다. 마흔을 앞두고 관성의 법칙을 깨기 위한 도전을 한다.



매일의 의지로 평온한 호수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

너는 존귀한 아이라고 입이 아닌, 눈빛과 표정, 마음으로 말하는 습관을 지니고 싶다.

그래서 아이만큼은 자기 본성대로 세상을 받아들여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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