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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Aug 24. 2021

우리, 같이 넘자



꼬깃꼬깃하게 접은 A4용지. 오늘도 아이 유치원 가방에서 쓰레기인지 분간이 안 가는 종이가 나온다. 3일 째다.



유치원 오후 시간에는 자율 활동을 하는데 아이는 거의 매일 선생님이 프린트해 준 그림에 색칠을 해온다. 흔히 말하는 색칠놀이. 보통은 색연필로 두어 번 그은 종이도 자기 작품이라고 구겨질까 봐 반 정도만 애매하게 접어서 집에 들고 온다. 그런 색칠 종이가 요 며칠 홀대를 받고 있다. 왜냐고 물어도 대답을 않더니, 색칠해 온 그림을 가위로 잘라주고 있는데 아이가 내 옆에 슬쩍 붙어 선다.



“친구가 선 삐져나오게 칠했대요~하고 놀렸어요.”



얼마 동안 친구의 말을 곱씹으며 소화시켜왔던 걸까. 아직 날짜 개념이 불분명한 아이에게 시점을 묻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나는 색칠을 못하나 보다 생각했어요.”



종이가 구박을 받기 시작한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짙은 패배감을 덤덤한 말투로 전달하니 걱정이 더 든다. 집에서도 선 안에 칠하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친구가 그런 걸로 놀리다니... 골도 나고.



말이 폭발적으로 느는 5살 아이들은 여과 없이 의사를 표현한다. 마음을 숨기는 법도 아직 배우지 못했지만 마음에 난 상처를 이겨내는 법 역시 배우지 못해서, 아이들은 말하고 들으면서 자기 마음을 시험한다. 펼쳐도 여전히 쪼글쪼글한 소방차 그림을 오리는 아이는 집중을 한 건지, 침울한 건지 말이 없다.



그러고 보니 서점에서 종종 보이는 색칠'공부'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선을 벗어나지 않게 색칠을 하려면 소근육의 조절 능력을 그만큼 정교하게 발달시켜야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하기에 '공부'라는 단어는 너무 무겁다. 아이들은 색칠을 하며 그들도 모르게 사회의 기준에, 경계에, 틀에 맞춰 자라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선을 결코 넘지 못하는 순종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색칠'공부'가 도입되었다는 의구심마저 든다. 구겨진 종이처럼 구겨진 아이의 마음을 달랠 엄마의 음모론이다.



이런 거부감이 드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내가 어릴 적에 색칠놀이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미술 시간에 제일 잘했던 과제물이 포스터 칼라 구성이었다. 선을 넘지 않고 그림을 완성해내는 건 처음으로 뜀틀을 넘었을 때처럼 짜릿했지만, 그 기분에 길들여졌던 나는 이제 장난으로라도 밑그림을 벗어나게 칠하지 못한다. 마치 줄에 메여있던 아기 코끼리가 어른 코끼리가 되어도 어릴 적 빙빙 돌던 그 거리 이상은 발을 내딛지 못하 듯, 나도 쉽사리 선 밖으로 손을 더 내뻗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학교에서 세상에 순응하는 법을 배울 텐데... 저 야무진 손가락이 가고자 하는 길을, 세상은 앞으로 얼마나 자주, 멈칫하게 만들까. 세상에 공부로 명명되지 않아도 될 것들이 얼마나 많고,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아도 생각보다 인생이 진창이 되지 않음을 말로 들어서 깨달을 수만 있다면 나는 앵무새가 되어도 좋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 말없이 색칠을 하고 그림을 그렸다.



“하윤아, 있잖아. 엄마는 하윤이가 부러워.

엄마는 이런 색칠 놀이할 때 선 밖으로 나가게 칠하는 게 더 어렵거든. 원래는 삐져나가도 되는 건데, 그게 참 어려워. 엄마 나이가 되면 삐져나가게 마구 칠하는 걸 사람들은 용기라고도 하고, 창의성이라고도 해.

엄마는 하윤이가 앞으로도 칠하고 싶은 대로 칠하면 좋겠어. 멋있어, 우리 아들.”



얼마나 알아들은 걸까. 아이가 씨익- 웃는다. 역시 아이들은 회복력이 좋다.



“응, 엄마 말이 맞아. 엄마도 그렇게 해. 한 번 해봐.”



복제력까지 좋네. 손은 내가 먼저 내밀었는데 정작 끌어당기는 힘은 아이에게서 나오는 때가 있다. 그래, 손 앞에 선이 놓여있으면 침 한 번 꼴깍 삼키고 한 번 넘어볼게.

우리, 손잡고 같이 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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