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이 Sep 09. 2021

그림책의 깊이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 보면 놀랄 때가 많다. 지금이야 보이는 스토리만 이해하지만 커서 읽으면 작가가 그 안에 숨겨둔 지혜를 발견할 책들을 만나곤 한다. 쉽게 쓰인 이야기들에게서 내밀한 깊이를 느끼는 날에는 아이가 잠든 후에 책을 다시 들춰본다.



책 제목은 ‘삐죽이와 넓적이의 집짓기 대소동’. 도형의 원리를 알려주는 동화이다.



뭐든지 세모인 삐죽삐죽 나라와 뭐든지 네모인 넓적넓적 나라가 있었다. 두 나라 사람들은 서로 자기들이 최고라고 툭하면 싸웠다. 싸우다 지친 두 나라는 삐죽이와 넓적이를 대표로 집짓기 시합을 하기로 한다. 집이 완성되자 세모 벽돌, 네모 벽돌로 지은 각자의 집으로 두 나라 사람들을 초대한다. 넓적넓적 나라 임금님이 먼저 세모 집 대문을 들어가려는데 좁은 입구에 머리가 끼고 만다. 들어가서도 벽이 세 개밖에 없어서 좁은 세모 집을 모두 불편해한다. 모든 게 네모로 이루어진 집에 들어간 사람들은 넓고 편하다며 넓적이에게 박수를 쳐준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고 네모난 지붕은 빗물이 빠지지 않아 지붕에서 물이 새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세모 집으로 갔다. 뾰족한 세모 지붕은 빗물이 잘 흘러내려서 물이 새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문은 네모, 지붕은 세모가 좋다고 깨달은 두 나라 사람들은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세모는 세모대로, 네모는 네모대로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이 도형의 원리를 가르치는 책으로 읽히지가 않았다. 삶의 원리를 담고 있는 듯했다. 살다 보면 뾰족이도, 넓적이도 그리고 동글이도 만나게 된다. 나도 그들도 저마다의 세계 속에서 관점과 경험을 쌓아왔기에 세상을 보는 생각의 틀도 세모, 네모, 동그라미로 각자 다르다. 익숙한 것만 쉬이 보이고, 보이는 대로만 평가하려는 경향 때문에 나와 다른 도형의 사람과 부딪히기도 한다. 다름을 수용하는 유연함은 점점 떨어져서 내가 속한 세계 속에 매몰되어가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나와 같은 어른들의 세계를 작가는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수학의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도형들의 원리를 알고 구별하는 것보다 도형들의 고유성과 유용성을 인정해서 서로에게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협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던 아니었을까. 어쩌면 책을 읽어줄 부모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넣은 건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아는 도형의 집만 고집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았다.



‘통섭’이라는 개념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최재천 교수는 생태학자로 생물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했다. 그 관계에 있어서 소통은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소통은 적당히, 대충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이와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필사적인 소통은 경쟁하는 관계 속에서 토론을 통해 누가 옳으냐를 따지며 상대를 제압하기 위함이 아니다. 충분히 의논해서 무엇이 옳으냐를 생각하는 숙론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언제든 다른 이의 집을 똑똑- 두들기고, 다름을 경험하고자 하는 용기 있고, 열린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공적인 소통의 결과는 네모 집을 짓고 세모 지붕을 얹어 전보다 나은 집을 짓게 되는 ‘통섭’이다.



이 얇은 그림책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로버트 풀검의 책 제목처럼 우리는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 같다. 하얀 도화지 같던 아이가 ‘다름’을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다름’의 장점을 먼저 찾고 귀하게 여겨주는 것이 아이의 장점이 되어있으면 좋겠다. 혼자 가는 길보다 같이 가는 길의 끝이 더 아름다울 거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 속의 사람이 되어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 배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