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이 Sep 01. 2021

암 덩어리 말



9日






말을 칼로 비유하곤 한다. 아니다, 말은 암(癌)이다. 칼에 베인 상처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암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옮겨 다니며 생명을 말라붙게 한다. 개복을 하거나, 방사선을 쪼여도 암세포만 걷어낼 수는 없다. 암은 정상적인 것도 함께 잃을 각오를 해야 그나마 치유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무서운 돌연변이다.



의류기획팀에 인턴으로 갓 입사한 사회 초년생 때의 일이다. 디자인 팀장이 상기된 얼굴로, 벽을 하나 두고 옆에 자리한 기획팀을 한 걸음에 건너왔다. 기획팀장과의 대척점에 서서 작업 지시서 정리가 잘 못 되어 디자인실 업무가 지연되었다고 말했다. 말투는 프로페셔널하게 꾸몄지만, 말의 기저는 짜증이었다. 작업 지시서를 정리해서 전달하는 업무는 내가 맡고 있었기에 곧바로 두 팀장 사이를 막아섰다.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나,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대뜸 팀장은 ‘앞으로 어떡할 건데?’라고 물었다. 말꼬리에서 적의가 느껴졌다. 이 적의가 내 잘못에서 유발된 게 맞는 걸까? 순간 의문을 품었지만, 입은 반사적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야, 여기 둘러봐 바.”



팀장이 손가락으로 의류상품기획부로 묶여있는 기획, 생산팀 사람들을 둘러 가리켰다.



“여기 열심히 안 하는 사람 없어. 열심히는 당연한 거야. 잘하지 않으면 소용없어.”



내가 소용없다는 말이다. 팀장의 손가락 끝에 걸려있는 사람들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정수리에 두 눈을 달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희다 못해 푸른 형광등은 사무실에 숨어들 구석 하나 없게 모든 곳을 비추고 있었는데 주위가 갑자기 암전이 된 것처럼 내 시야만 컴컴해졌다. 어둠 속에서 정수리의 희 번뜩한 눈들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말로만 치면 모욕적인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모욕감을 느꼈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지만 가슴은 먹먹했다.  



그 말 후로도 한참 몰아붙이는 팀장과 수십 개 눈 속에서 곧 꺼질 듯 오그라드는 불씨처럼 나는 위태로웠다. ‘잘하겠습니다.’ 그 이상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해 사자 앞에서 나 죽었소-, 하고 웅크린 토끼처럼 서서 몸을 말았다. 그나마 그의 화를 누그러뜨릴 차악의 방편이었다.



열심히 할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 회사,

결과로 과정을 증명하는 실전.

오직 잘하는 것만 기억하는 세상.



두개골이 찌릿했다. 팀장의 결과주의적 언사는 ‘바위’라는 뜻을 가진 암처럼 돌 덩어리가 되어 몸속 어딘 가에 묵직하게 눌러앉았다. 그 덩어리는 꿈에서부터 나를 전복할 심산이었다. 쫓기는 꿈을 꾸게 되었다. 높은 건물 옥상과 좁은 골목 사이를 달리면서 지구를 끌어올리는 것 같은 몇 배의 중력을 다리로 느꼈다. 그 다리가 너무 무거워서 실상은 거의 마음만 달리고 있었다. 겨우 어느 건물 안, 막다른 복도의 방에 들어간다. 방문이 두 개인 방이다. 들어온 문의 반대쪽 문고리를 돌려도 방문이 열리지 않는다. 늘 이런 식이었다. 문고리를 두 손으로 쥐고 신경질적으로 흔드는 동안 등 뒤로 바짝 다가온 존재의 숨을 느낀다. 더 이상 도망갈 수가 없다. ‘끝이다’ 하고 뒤를 돌아보면 그 존재는 얼굴이 없고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누군지 알 수 없었고, 왜 나를 쫓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찝찝하게 끝나버리는 패턴의 꿈을 참 오랜 기간 동안 꾸었다.


 

암덩이 말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숨 쉴 때마다 생각났다. 완벽하지 않은 일은 드러내지 않았고, 잘하는 것으로 비칠 것만을 공유했다. 그 빈도가 높아지도록 스스로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팀장처럼 전문가 양 말하는 법을 익혔다. 치밀한 사람이 되어가고, 주변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조바심이 났다. 암세포가 제한 없는 세포분열을 하며 정상세포들을 장악하는 것 같았다. 눈가리개를 단 경주마 같이 일에만 집중했다.



압박감은 기어이 결정체가 되었다. 회사 건강검진에서 갑상선 암을 발견했다. 졸지에 왼쪽 갑상선 전체, 오른쪽 갑상선 일부가 없는 26되었다. 원래 어디 있었는지도 모르던 부위인데 환상지 증상처럼 존재가 느껴져서 자꾸 목을 쓸어내렸다. 병원에 누워 하루가 그렇게   오랜만에 느껴봤다. 완벽하지 않아도, 잘하지 않아도, 심지어 열심히 하지 않아도 해가 뜨고 날이 저물었다. 병실 창문으로 불야성 같은 신촌을 바라보며  목에 있던 암세포를 도려낼 , 그간 쌓여있던 심리적인 문제들도 제거되었다고 자기 암시를 했다. 이후에도 종종  덩어리 같은 말들이 나를 위협했고, 그때마다 나는 그것들을 집도하는 외과의사가  상상을 했다.



몇 년이 지나, 디자인 팀장의 아내도 갑상선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그에게 적의로 보답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의 그녀가 예쁜 꿈을 꾸고 있기를 바랐다. 수술은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줄, 루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