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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Sep 02. 2021

시계에 반하다.

런던 이야기 1



10日






어딘지 멜랑꼴리한 무드가 있는 매력적인 런던에서 사는걸 꿈꾸다 보니, 정말 런던에서 2년을 살게 됐었다. 2년 중 1년을 지낸 집은 템즈강 남쪽의 람베스 구역에 있었다. 강북보다 집값이 저렴하면서도 몇 분만 걸어 나가도 강을 볼 수 있고, 피카딜리나 트라팔가 스퀘어 등의 중심지와도 가까워 학생들이 지내기에 참 좋은 입지였다. 무엇보다 방 안에 앉아 있으면 멀리서 들리는 국회의사당 빅벤의 종소리가 참 좋았다. 방 안의 시계를 볼 필요 없이 15분마다 울리는 빅벤의 은은한 알람 소리로 읽던 책을 덮을 수 있다는 건, 느껴보지 못했던 낭만이었다.



빅벤은 내 방의 알람 시계이면서 등대였다. 반짝이는 빅벤을 등지고 곧장 강을 건너 큰 길만 따라가면 플랏에 도착했다. 귀갓길에 가끔 낯선 골목을 찾아들어가곤 했는데 런던의 골목은 네모 반듯하지 않고 사선으로 만나는 길이나, 작은 갈래길들이 많아 방향을 잃기 일쑤였다. 저녁에는 구글 지도를 켜기보다 멀리 빅벤이 어디 있는지 보고 불빛을 따르면 강변으로 나올 수 있었다.



빅벤 때문에 런던에 살고 있다는 걸 매일 체감했다. 거대한 시계를 강 이남에서 바라보면 처음에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할 정도로 현실감이 없다. 시간차를 두고 아, 내가 지금 런던이구나. 하고 판단할 만큼 시계탑은 그림 같이 우뚝 서있었다. 시시각각 하늘이, 날씨가 변해도 아름다운 그 모습에 마음이 홀려, 사우스 뱅크 벤치에 외투를 여미고 앉아 되도록 오래 눈에 담으려고 했던 날들이 많았다.



보면 볼수록, 빅벤이 사람이라면 닮고 싶다고 생각했다. 관광객들은 빅벤을 통해 시간을 읽기보다는 휴대폰 배경화면을 얻기에 바쁘다. 나에게 카메라를 맡기던 사람들은 빅벤을 배경으로 두고 두 손으로 밀고, 들어 올리는 포즈를 취했다. 이름의 기원도 잘 모르지만 어쨌든 명소에 다녀왔다고 자랑할 사람들에 의해 기념품 상점 선반에 빅벤 모형은 비워지고 다시 채워졌다. 주변에서 지지고 볶고 북을 치고 장구를 쳐도, 빅벤은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는다. 늘 그 자리에서 묵묵히 15분마다 종을 울린다. 은연중에 누군가의 알람이 되고, 등대가 된다.



노트 정리를  하다가 사우스 뱅크 벤치에 앉아 썼던 글을 찾았다. 묵묵한 시계에 반했던 나의 지금을 돌아본다. 본질을 잃지 않았는지, 원치 않게 진가를 왜곡당해도 의연하게 내가 해야 할 일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지. 또 나의 꾸준함이 선한 의도가 되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을지.

답을 적을 수가 없고, 밤만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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