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이 Sep 03. 2021

어쩌면 가장 소중한 무용의 것들.

런던 이야기 2



11日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런던은 허연 유막이 낀 것처럼 구름이 엷게 끼는 날이 잦아서 동그란 해를 직접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 쨍하니 해가 뜬 날은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된다. 격자 창문을 활짝 열고, 이부자리는 햇빛 샤워를 위해 부지런히 널고 근처 공원으로 나가야 한다. 런던은 곳곳이 공원이다. 굳이 하이드 파크 같이 이름에 공원이 붙은 곳으로 갈 필요도 없다. 동네에 풀밭이 있으면 그냥 가서 누우면 자리 임자다. 집 건너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앞마당에 자리를 잡았다. 특별한 관공서나 조경을 해둔 곳이 아닌 이상 ‘잔디를 밟지 마시오.’ 같은 안내는 자주 보이지 않는다. 잔디의 효용은 관상이 아니라 함께 부대끼는 것에 있음을 여기 사람들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새우 칠리 랩과 잉글리시 블렌드 티. 휴대폰과 이어폰, 책 한 권이면 더 챙길 것도 없다. 혼자 만의 단출한 피크닉이다. 이맘때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 푹 빠져있었다. 한 순간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과 그들로 가득 찬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곁눈질로 잔디에 모여드는 사람들과 도시를 관찰한다. 그러면 마치 멀었던 눈을 떠서 모든 걸 처음 보는 것 같은 미시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기서 완벽한 타인이다. 같은 태양, 같은 잔디, 같은 사람임에도 낯선 시선을 가지면 아름다운 피사체가 된다.



맑은 날에는 런던 사람들의 햇빛에 대한 갈망을 쉬이 알 수 있다. 선글라스를 쓰고 무표정으로 길을 가던 사람들이 하늘과 잔디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자연스럽게 풀밭으로 들어온다. 나는 햇빛을 즐긴다 해도 보통 나무 아래 자리를 잡지만 진정한 런더너는 풀밭 한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남자는 입고 있던 남방셔츠를 벗어 바닥에 깔고, 메고 있던 두툼한 가방을 툭-떨구고 쿠션으로 괴어 앉는다. 여자는 갈색 쇼퍼백에서 연하늘색 숄을 꺼내 제 몸만큼 넓게 펼치고 위에 엎드린다. 무릎쯤 오는 치마를 입고 있지만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금발의 머리카락에 빛이 부서지며 반짝거렸다. 모두 꼼짝 않고 한참을 그대로 있다.

선글라스 아래 눈이 가는 길이야 내가 알 바 아니지만, 깜빡 잠이 들었거나, 쉴 새 없이 눈만 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사람들은 자연의 광영을 온몸으로 담뿍 받아들일 줄 안다.



해, 구름, 바람, 잔디.. 입고, 먹고, 일하고, 자는 바쁜 도시의 일상에서는 무용하다고 치부되던 것들이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이 무용의 것들을 흠뻑 느낀 적이 있던가? 바람에 일랑이는 나뭇잎 사이에 나왔다 숨었다 하는 해와 숨바꼭질을 했다. 손가락으로 바람을 건졌다. 풀 때문에 등이 조금 가려운 것도 같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삶을 살찌우는 유용한 것들. 어쩌면 가장 소중한 것들. 잊지 않는다면, 세상이 좀 더 인간다워지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시계에 반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