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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Sep 04. 2021

오이스터 카드와 튼튼한 다리

런던 이야기 3



12日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유학생. 관용적이지만 더 이상 딱 들어맞을 표현이 없다. 런던은 구역을 세분화해서 그에 따라 지하철 요금이 정해지는데 교통비를 줄여 최중심지인 zone 1에 방을 구했다. 월세 때문에 먹고 쓰는데 한국에서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다. 끼니를 거르고 다니다 돌아오는 길에 중국집에서 탕수육에 볶음밥 하나를 포장해 나오면 좋아서 어깨가 들썩거렸다. 영국인의 든든한 뱃고래 덕에 1인분이래도 넉넉한 양의 음식을 반 정도는 소분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나머지는 소스에 밥까지 야무지게 비벼 먹고 나면 내일을 시작할 힘이 샘솟았다.



당시 나의 제일 큰 무기는 충전해둔 오이스터 교통카드와 튼튼한 두 다리. 오이스터는 알다시피 먹는 ‘굴’이라는 단어인데, 딱딱한 껍질은 ‘보안’, 그 안에 진주를 품고 있다는 ‘가치’라는 의미를 카드 이름에 함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번번이 내가 충전한 금액으로 실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와 내가 이동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거리가 어긋나는 일이 발생했다. 개찰구에 카드를 찍는데 충전을 하라고 삑-삑 소리가 났다. 절대 가치와 상대 가치가 충돌하는 소리였다. 아... 자본주의란. 나의 행동반경이 돈에 의해 제한된다니 좀 서러웠다.



목돈이 들어가는 정기권은 부담스러워 아르바이트를 할까 말까 저울질했다. 투입하는 노동 시간의 대가로 받을 돈과 줄어들 자유 시간,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서 생길 금전적 기회비용과 여유 있는 시간 동안 런던에서만 얻을 수 있는 가치가 부딪혔다. 그래도 이기는 쪽은 후자여서 아르바이트 고민은 관두고 요일을 정했다. 교통 요금에는 이동거리, 횟수에 상관없이 하루 최대 £6.60이라는 데일리 캡(daily cap)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정해둔 요일에는 버스,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이름이나 주변이 마음에 들면 내려서 둘러보고 다시 차에 올라타며 원 없이 돌아다녔다.



교통카드를 쓰지 않기로  날은 걸을  있는 만큼 걷는다. 자본주의도  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가 빙의된 듯이 런던 지도라도 그릴 기세누비고 다녔다. 쉬지 않고 보고 발견하고, 듣고 유추했다. 모든 것이 너무 생경해서 오히려 전율이 일었다. 건물, 사람, 그들의 행동, 그들의 대화, 신호체계, 글씨, 가로수, 상점들. 새로운  받아들일  있는 만큼 받아들여보고 싶었다.



혼자 걸으면서 즐겨하던 놀이는 숨은 그림 찾기다. 런던을 걷다 보면 동그란 푸른색 명판을 단 집들이 있다. 블루 플라크(blue plaque)라고 불리는 이 명판은 유명인들이 살던 집에 붙이는 인증 마크이다. 건물벽에 무심히 붙어있기 때문에 숨은 그림을 찾듯이 주의 깊게 봐야 보인다. 수백 년부터 수십 년 전에 이르기까지 위인이 살던 집이 지금까지 그대로 보전되어있는 것도 놀랄 노릇인데 쓰인 이름들을 읊어보면 더 놀랍다.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케인스, 바이런, 조지 앨리엇, 버지니아 울프… 블루 플라크가 붙은 건물을 찾아내면 새겨진 이름을 구글에서 검색해서 일대기를 읽었다. 내가 보고 있는 저 문을 윈스턴 처칠이 드나들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유명인의 삶을 내게 입혀보는 상상은 다시 걷게할 만큼 원기를 돋우었다. 점점 체력이 좋아졌다. 몸도 정신도 풍요로운 시절이었다.



아이작 뉴턴이 살던 건물인 내셔널 갤러리 뒤편의 도서관에 들러 시험공부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하철 역 앞에서 아이 손을 꼭 잡고 두리번거리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 사람들은 동양인 구별을 어려워하지만 한국인은 한국인을 기가 막히게 잘 알아본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도 한국 사람인 나를 알아보고 아는 사람을 만난 듯 반가워했다. 엄마와 아들, 둘이 배낭여행을 왔는데 전쟁박물관을 찾고 있었다. 갈래길이 많은데 휴대폰 심카드는 말을 안 듣고 가이드북의 지도가 실제와 잘 맞지 않아서 책을 위아래로 빙빙 돌리며 방위를 맞춰보고 있었단다.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아이와 단둘이 유럽으로 날아온 엄마가 정말 대단해 보였다. 미래의 나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는 낯선 곳에 대한 불안과 엄마가 난관을 헤쳐나갈 거라는 신뢰가 뒤섞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전쟁박물관의 방향을 가리켜주고, 박물관 앞에 ‘수사슴 세 마리’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펍이 있는데 피시 앱 칩스가 맛있으니 아이와 가봐도 좋을 것 같다고, 굳이 묻지 않는 것까지 알려주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엄마에게 말했다. 지하철 많이 타지 마시고 차라리 버스를 타고 아무 곳이나 마음에 드는 곳에 내려걸으면서 가이드북을 찾아보시라고. 생각보다 더 멋진 여행이 될 거라고. 아이 엄마의 얼굴이 밝아지며 어린 나에게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정말 멋진 엄마다. 얼굴의 긴장이 좀 풀어진 아이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며 돌아서는데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The world is your oyster!’



세상은 기회로 가득 차 있고, 넌 어디든지 갈 수 있어!

오이스터 카드와 네 두 다리를 믿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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