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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Sep 16. 2021

연꽃 같은 사람

외할머니 이야기 2.



22日






역시나 파란 슬레이트로 만든 변변찮은 문 옆에, 빨간 궁서체의 간판이 붙어있었다. 도둑조차 올 필요를 못 느끼는 집에 간간히 사람들이 찾아왔다. 보통은 혼자, 혹은 두 명이 왔는데 ‘계세요-’ 하는 말소리로 초인종을 대신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나를 두고 건넌방으로 가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울 울리는 소리와 촤-하고 쌀알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때만 해도 할머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랐다. 평범하지 않다고만 생각했다. 어린 나에게도 ‘평범’이라는 범주로 사람을 가름하는 능력이 있었다. 건넌방에서는 추상같은 호통 소리가 나기도 하고, 손님이 흐느끼는 소리도 났다. 지금의 나는 이 직업을 카운슬러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따끔하게 혼내기도 하고, 따뜻하게 위로를 건네기도 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직업.



할머니와 친구의 대화를 들었었다. 당신이 회피하면 자식들에게 업이 전해질까 봐, 하던 장사를 접고 이 일을 시작하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인생이란 수많은 선택이 모여 가리키는 방향으로 간다지만, 한 번의 결정으로 선교사 집안에 태어났던 할머니 인생은 예상치 못한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당신 자식에게도 신세 지기를 싫어했기에 할머니는 당당하셨다. 강감찬 장군의 후손답게 모든 일을 기백이 넘치게 해내시는 통에 엄마도 쉬이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그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어린 나이에 전쟁을 겪은 세대의 어머니상이 그랬던 걸까. 도움은 끝끝내 받기 싫어하면서도, 자식과 이웃에게는 제 곳간 비는 줄 모르고 퍼주던 할머니는 억척스러우면서도 본받을 만한 엄마의 엄마였다. 불의의 사건을 겪고 뇌졸중으로 병원 신세를 질 때까지, 할머니는 전국 명산의 사찰을 찾아다니셨다. 봉우리 이름이 새겨진 큰 바위 옆에 등산 스틱을 쥐고 찍은 사진들에서 의기양양함이 묻어났다. 고단함을 물리치고 높은 산을 오르면서 우리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셨을 거다. 돈으로는 빚진 것이 없어 여생이 자유로울만 한데, 자식들에게 빚진 마음 때문에 신발이 닳도록 사찰의 일주문을 넘어 다니셨다. ‘내 뒤에 남겨질 사람들을 위해 할머니처럼 살 수 있을까?’ 하고 나 자신에게 물었을 때 바로 대답한다면, 답이 어떻든 그 대답은 가짜일 거다. 그만큼 숙고가 필요한 삶이었다.



할머니의 눈은 맑았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올리는 근면함이 눈에서 드러났다. 사소한 행동이라도 남에게 폐를 끼칠 만한 것이면 참지 않으셨다. 눈물이 쏙 빠지게 꾸중을 듣기 전부터 그 맑은 눈을 마주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맑은 눈의 근원은 맑은 정신이었고, 맑은 정신의 원천은 책에 있었다. 책을 좋아하시던 할머니는 어느 날, 정말 어느 날 뇌졸중 증세로 병원에 입원하셨다. 말투는 어눌해지고, 눈빛은 흐려지고, 팔다리는 둔해져 갔다. 이제 책은 언감생심 읽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라는 불씨가 서서히 꺼져가는 것을 나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바라보았다. 어떤 불쏘시개도 불씨를 예전처럼 타오르게 할 수가 없었다.



“나, 이제 바보가 되어 가나 봐.”



머릿속 지식의 탑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느끼던 할머니는 내가 요양원에 면회를 갈 때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양원에서 준비해둔 수업이라야 유치원생들이 할만한 종이접기, 그림 그리기 등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확인을 받고 싶으셨던 것 같다. 바보 아니라고, 할머니 아직 할 수 있는 거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으셨을 거다. 나는 살가운 위로를 하기에 멋쩍어서 오히려 볼멘소리를 했다. 무슨 그런 말을 하냐며. 그게 진짜 바보 같은 소리라고. 예전의 당당했던 모습이 너무나 그리웠다.



외할머니는 먼 길 떠나는 날 마저 신세를 지지 않으셨다. 영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비행기 날짜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장례를 마치고 나니 곧 출국날이었다. 비행기로도 갈 수 없는 곳으로 가신 할머니의 죽음이 그때서야 실감이 났다.








쓰다 만 스프링 노트들을 다시 쓸 요량으로 정리를 하던 중이었다. 사이에서 할머니가 복지관을 다니실 때 쓰시던 노트가 나왔다. 그때는 서서히 치매가 오던 시기였다. 노트 첫 페이지에는 큼지막하게 ‘딸’이라고 쓰여있고,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외할머니 이름과 ‘우리 집’ 글씨 옆에 휴대폰 번호도 쓰여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딸의 번호가 생각나지 않을까 봐 걱정돼서 써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장부터 할머니가 쓴 글들이 나왔다. 손가락에 힘이 빠져서 흔들의자처럼 어질 한 글씨들은 한문과 일본어로 뒤섞여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나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딸의 이름도, 번호도 가물해질까 염려하는 노인이었지만, 아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적고, 또 적었을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환경에 굴하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배우고자 했던 나의 외할머니는, 수행자를 상징하는 연꽃 같은 사람이었다. 잊지 않기 위해서 노트를 책상에서 가장 손이 잘 닿을 곳에 꽂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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