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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Sep 17. 2021

살아있는 책

전환의 계절



23日






음악을 연주하는 자는 금속 악기로 시작해서 마칠 때는 소리를 올려 떨친다. 순수하게 나가다가, 끊어질 듯 이어지며, 마침내 화합을 이룬다. 이렇게 해서 악장이 이루어진다. 하늘은 1년을 한 악장으로 삼는다. 처음에는 싹트고 번성하며 곱고도 어여삐 온갖 꽃이 향기롭다. 마칠 때가 되면 곱게 물들이고 단장한 듯 색칠하여 붉은색과 노란색, 자줏빛과 초록빛을 띤다. 너울너울 어지러운 빛이 사람의 눈에 환하게 비친다. 그러고 나서는 거둬들여 이를 간직한다. 그 능함을 드러내고 그 묘함을 빛내려는 까닭이다.

-다산 정약용, <백련사를 노닐면서 단풍잎을 구경하고 지은 시의 서>



 눈으로 보는 세상을 글로 담고 싶었는데 주객이 전도되었다. 글을 쓰겠다고 세상에서 눈을 거두어 노트북 화면에 처박고 있다. 계절의 변화는 코가 먼저 알아차렸다. 공기의 무게와 온도가 달라지고 있었다. 찬바람에 민감한 코가 슬슬 숨구멍을 조이자, 그제야 고개를 들어  밖을 보았다. 나뭇가지와 잎들이 약간의 엇박을 내며 흔들렸다. 생생했던 단풍나무 잎들은 오그라들어 있었다. 은행나무 가지 사이에 동글동글한 것들이 맺혀있다. 설익은 가을이 왔구나.



다산 정약용에 대한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워낙 다방면으로 글을 썼던 다산이라 그의 책은 아무 때나 펼쳐도 때에 어울리는 글을 찾을 수 있다. 비발디의 사계와 공명한 듯 계절을 악장으로 비유한 글이 눈에 띈다. 한 해 동안 생멸하는 모든 것은 차오르고 기운다. 기승전결이 있다. 며칠 전부터 불어오는 시원하지만 묵직한 이 바람이 전환의 운을 띄우고 있었다.



나가야겠다. 시간이 많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지만 노트북을 닫고 마당으로 나왔다. 가을볕에 얼굴이 따끔하다. 일광에 살짝 변색된 파라솔을 펴고 라운지체어에 앉았다. 와닿지 않는 컴퓨터 배경화면처럼 멀게 느껴지던 마당 풍경을 눈앞으로 조금 당겨왔다. 작가 놀이한다고 꽤 오랫동안 관리에 소홀했다. 잔디 사이의 토끼풀은 여전히 아우성이다. 강아지풀은 쑥쑥 잘도 뽑히는데, 이 녀석들은 바닥에 전선을 깔아놓은 것처럼 잔디 뿌리 밑으로 파고들며 옆으로 세를 늘린다. 마당 불청객의 생명력이 경이롭다. 다행히 내가 직접 모셔온 식객들도 잘 지내고 있었다. 땅콩 꽃은 피고 지면서 꽃대가 다시 땅으로 파고 들어갔다. 곧 땅콩을 캘 수 있을 것 같다. 걷잡을 수 없이 커버린 깻잎은 먹지는 못하고 나중에 깨나 털어서 먹어야 할 것 같고. 보라색 맥문동 꽃은 보기만 해도 안식이다. 나는 해준 게 없는데 조건 없이 내어주는 식물들에게 오랜만에 감사를 전했다.



오늘따라 더 높아 보이는 파란 하늘로 내가 존재하는 공간의 크기를 가늠해본다. 아주 거대한 반구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저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나는 그냥 비트맵 파일 속 작은 픽셀일 텐데. 그마저도 당겨서 보면 옆의 픽셀들 사이에 묻혀버릴 만큼 작은 픽셀. ‘어차피 넌 보잘것 없이 작으니까 아등바등하지 마.’가 아니라, ‘그러니까 눈치 볼  것 없이 하는 일에 더 담대해야지.’ 생각한다. 계절을 만나느라 시간이 줄어든 만큼 무거운 마음이 정비례해야 하는데, 오히려 한결 가벼워졌다.



책상에 앉아서 이 전환의 계절을 놓칠 뻔했다. 계절과 절기를 관찰하면 소소하고 의식하지 못하던 것들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이런 건 종이책으로 배울 수 없다. 내가 느껴야 한다. 살아있는 책 속에서 쉼표와 마침표를 찍으면서 걸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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