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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Sep 18. 2021

조화 구매 담당입니다.

추석 연휴첫날



24日






본격적인 명절 연휴가 시작되면 먼저 들르는 곳이 반포 고속터미널 꽃 시장이다. 외할머니 산소에는 봉분 양 옆으로 돌로 만든 꽃병이 한 개씩 놓여있다. 명절 때마다 꽃병에 꽂을 꽃을 사 오는 것이 나의 임무다. 물론 생화는 아니다. 그렇다고 조화를 얕봐서는 안된다. 요즘 나오는 조화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이 색깔도 자연스럽게 나오고, 질감 등의 디테일 표현이 깜짝 놀랄 만한 수준이다. 



사실 우리 집은 서울 근교에서 가장 가깝고 유명한 화장지이자 공원묘지가 많은 지역에 있다. 대로변에 꽃집들도 많은 편이고 묘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화도 많이 취급한다. 그런 가게들을 방문하면 듣는 말이 늘 똑같다. 햇빛에 금세 색이 바래기 때문에 촌스럽다 느껴질 만큼 빨갛고 노란 조화가 오래가서 좋다고 한다. 자연스러운 색상의 조화는 없냐고 물어보면, 어중간한 색을 꽂아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보기 싫어진다는 말만 거듭한다. 



이쯤 되면 산소에 꽃은 왜 꽂을까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안 꽂으면 허전해 보일까 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예뻐 보이라고? 망자와 연고 없는 사람에게 묘지란 예뻐봤자 묘지다. 그럼 결국 산소에 모인 가족들의 만족을 위해서 아닌가! 내 기준에서 ‘예쁜’ 것이 중요하다. 예쁜 꽃을 보면서 돌아가신 분이 생전 좋아하셨던 꽃 이야기도 나누고, 기분 좋게 음복도 할 수 있다. 일 년에 산소를 찾아가는 건 고작 두어 번.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로 치부하기 싫었다. 색이 오래 유지된다는 이유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가 1년에 두 번 창고에서 나오는 이 촌스러운 조화를 사고 싶지도 않았다. 일을 조금 더 재미있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굳이 서울까지 나온다. 



단골집 이름은 시크릿 가든. 들어서면 향기만 없지 여느 꽃집과 똑같다. 이 많은 꽃들이 다 생화였으면 나는 향기에 질식해서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여기 사장님만은 내 마음을 이해해준다. 산소에 꽂을 꽃이 일반 꽃다발 같으면 뭐 어떠냐고 맞장구를 쳐주신다. 그러면 나는 신이 나서 이번에는 어떤 꽃들을 데려갈까 즐거운 고민에 빠진다. 손님은 기분이 좋으면 손이 커진다. 장사를 할 줄 아는 분이다. 



올해는 채도가 높은 자줏빛의 작약을 중심 꽃으로 잡아보았다. 플라워 클래스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꽃을 고를 때 나는 가장 중심 꽃을 정하고, 전체적인 톤을 정해서 구성하고, 톤을 돋보이게 해 줄 포인트 컬러를 넣어준다. 서로 다른 것들을 조화롭게 모으는 일은 말은 쉬운데 실제로 해보면 참 어렵다. 만사가 그렇지만. 그래서 마지막은 역시 전문가 사장님에게 맡기는 편이 좋다. 이거 괜찮을 거 같은데? 하고 뽑아오는 꽃이 음, 괜찮을까.. 싶은데 결과물을 보면 물개 박수를 치곤 한다. 꽃 종류가 이렇게나 많은데 내가 모른다고 아무 이름이나 말하는 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집는 꽃마다 사장님 입에서 이름이 탁탁 나온다. 



“사장님 이 많은 이름 어떻게 다 외우세요?”


“꽃장수가 꽃 이름을 모르면 어떻게 해요? 어떻게든 외워야 먹고살지!”



우문현답이다. 나도 눈썰미를 장착해서 사장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말해주는 이름과 꽃 모양을 매치해서 기억하려고 애쓴다. 다음엔 나도 꼭 이름 이야기하면서 아는 척해야지. 



40분 만에 조화로운 조화 꽃다발 두 개가 완성되었다. 계산기를 두들기려는 사장님께 선수를 친다. 저 비싼 거 고른 거 없죠? 가격도 모르고 다 골랐으니까 사장님 알아서 가격 잘해주실 거죠? 하면 사장님은 ‘눈은 높아서’ 비싼 거 다 골라놓고 싸게 달라고 한다며 핀잔을 준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꼼짝없이 사장님이 달라는 대로 줘야 한다. 눈이 높아서라니. 아이 참, 기분 좋게. 역시 장사를 할 줄 아는 분이다. 



명절에 하는 일들이 의미가 없어 보이던 때가 있었다. 생각을 조금 비틀어보니, 내가 해야 할 의무는 받았어도 의미까지 다른 이에게 부여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맡은 일을 관찰하고, 되는 대로 하기를 경계하면서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봤다. 그랬더니 이렇게 좋은 단골집이 생겼다. 가족들에게 대단한 일을 해낸 듯 꽃다발을 자랑한다. 1년에 두 번 하는 이 일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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