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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Sep 19. 2021

반려 그림



25日






세 식구 사는데도 빨래가 왜 이리 많은지, 개어도 개어도 끝이 없는 빨래와의 전쟁을 치르다가 잠시 손을 놓는다. 끝까지 다 하고 쉬면 좋은데 끈기가 부족하다. 거실에는 나의 반려그림이 있다. 이런 짬에 올려다보는 위안이다.



푸르 다기 보다 짙은 암록에 가까운 색이 물의 깊이가 얕지는 않음을 알 수 있는 수면. 물결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강보다는 잔잔한 호수가 아닐까 싶다. 그 위에 나란히 떠있는 조각배 둘.



불쑥 찾아오는 인연들이 있다. 시절에 따라 사람일 수도, 기물일 수도 있었다. 이 때는 그림이 시절 인연이 되어 우리 집으로 왔다. 그림을 좋아한다는 것과 그림을 구매한다는 것이 동의어는 아니다. 안 한다기보다는 못한다에 가깝지만 좋아한다고 해서 꼭 사야 하는 건 아니다. 나는 한 작가를 흠모해서 전시를 찾아가곤 했었다. SNS에서도 활동하는 그녀가 피드에 그림을 올릴 때, 좋아요 버튼도 잘 누르지 않고 조용히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소장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력하게 들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예술은 감각보다는 직관으로 보는 것이다. 나에게 아주 명확하게 인식되었다 할지라도, 타인에게 그것을 그대로 전달할 수 없다. 테크닉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것이 예술에는 담겨있다. 나는 나 자신에게도 소장을 해야 할 합리적인 이유를 들지 못했다. 머리를 설득하기 보다 손이 빨랐다. 작가의 작품을 단독으로 관리하는 화랑에 바로 연락을 넣었다. 내가 그림을 사고 싶다고. 화랑 대표가 그림이 아직 건조가 되지 않아서 갤러리로 오기까지는 며칠이 걸릴 것 같으니 도착하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림을 본 지 직접도 아니고 휴대폰 화면으로 본 지, 약 10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누군가 먼저 데려갈까 봐 조바심이 났던 모양이다.



며칠 뒤 온 가족이 함께 갤러리로 가서 그림을 마주했다. 작가의 그림은 친절하면서 친절하지 않다. 드러나는 사물은 그것을 떠올리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원형의 형태를 가진다. 작가가 그리는 집은 우리가 집이라고 할 때 관념적으로 심어둔 뾰족한 박공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다. 주변의 나무나 대지, 정물도 어쩌면 우리에게 모두 익숙한 것들이다. 그러나 표현된 것들은 뚜렷하지 않다. 제목도 무제가 많다. 왜, 에 대한 질문에 친절하게 답하지 않지만 그렇기에 보는 이가 생각을 담을 넉넉한 여지를 준다. 그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바통을 넘겨주는 느낌이다.



남편은 갤러리에서는 말이 없었다. 아이가 다른 작품에 손을 댈까 신경을 쓰느라 첨언할 여유도 없었지만, 결정이 느린 아내가 지체 없이 두 사람을 데려  보면 굳이 말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집에 돌아와서 그림을 걸고 나니 그제야 ‘아까 보는데 그림 좋더라.’ 한다.  말을 먼저 꺼내는 사람은 아니라,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 위에 떠있는 작은 조각배 위에 집은 같은 듯 다르다. 지붕의 각이 다르고, 색도 묘하게 다르다. 두 조각배가 각기 다른 삶을 살다가 가족이 되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나와 남편으로 보였다. 조각배는 긴밀하게 붙어 평행하게 나아가는 듯 하지만, 배의 선두를 보면 아주 작은 각도로 안쪽으로 틀어져 있다. 둘은 결국은 한 점에서 수렴할 것이다. 우리도 그럴 것이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서로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힘내자’ 하고 귓속말을 하는 것 같다. 콧날이 시큰해졌다. 필요한 부분만 잘라낸 것 같은, 그림의 사이즈가 프레임 바깥 부분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저 뒤에 졸졸 따라오는 꼬마 조각배가 하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 세 식구가 같은 곳을 보며 나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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