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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Sep 22. 2021

글쓰기 30일 갈무리






매일 글을 발행하기로 한지 30일이 지났다. 읽기만 하던 내가 쓰는 것을 겸하면서 달라진 점을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하나, 서점에서 보는 것들이 달라졌다.

나는 불쑥 서점에 가는 걸 좋아한다. 약속 시간 전 여유가 있을 때, 그냥 차 타고 어딘가로 외출하고 싶을 때, 지금 당장 어떤 책이 읽고 싶을 때 서점으로 간다. 서점에 가서 그날 보고 싶은 카테고리만 소위 ‘뽀개기’를 한다. 드넓은 서점에서 내가 실제로 지나는 동선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서점에 가서 베스트셀러 순위를 살펴본다. 철저하게 내 취향이나 필요에 의해서만 살펴보던 매대도 낯선 시선으로 둘러본다. 심지어 기웃거리지도 않던 코너도 가본다. 이쪽에는 어떤 책이 있나.. 커버 디자인 트렌드가 어떤가 평가도 해본다. 누가 보면 출판사 취직했는 줄 알겠다.



둘, 꼭지의 끝맺음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서 끝을 맺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구나 절감한다. 처음은 술술 시작하다 중간도 어찌어찌 넘어가는데 마지막에서 턱 막힌다. 어떤 날은 마지막을 먼저 써두기도 한다. 대단히 멋지게 마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부지불식간에 비슷하게 쓰이는 마무리에 스스로가 질려서 그렇다. 고심해서 쓰지 않으면 쓰이는 대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의 결말은 좀 더 생각해서 쓰고 싶다. 남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끝내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꼭지마다 마지막 문장을 찾아 복기한다.



셋, 만물에 관심이 많아졌다.

글감을 찾는 하이에나가 되었다.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냥 본다기보다는 모든 ’것’을 나와 연결해서 보게 되었다. 세 다리만 건너면 세상 모든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 ‘것’들과는 짐짓 먼 사이인 듯해도, 지구가 머리에 이고 있는 하늘 아래 모든 존재는 뗄 수 없이 연결된 존재들이다. 세상 어딘가의 타인과의 동시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조금 덜 고독해진 것 같다.



넷, 글쓰기가 슬슬 일상과 버무려진다.

쓰기에 힘이 조금 덜 든다. 아니 힘이 조금 빠진 게 맞나. 그러고 보니 둘은 조금 다르다. 전자가 내 근육을 키워 외부세계를 극복하는 느낌이라면 후자는 힘을 뺐더니 원래 가지고 있던 가능성이 드러나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후자가 마음에 든다. 처음 보름 동안 일상이 쓰기 중심으로 돌아가서 먹는 것보다, 자는 것보다,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데 온 힘이 들어갔다. 내가 지금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지? 하는 회의감이 들었을 때 다행히 주변의 응원으로 하루를 버텼다. 대충 읽히지 않기 위해 대충 안 쓰겠다고 호랑이 기운으로 시작한 게 부끄러울 정도로 우리 동네 고양이 나비같이 비빌 데 가서 적당히 비비는 정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더니 오히려 쓰기가 편해지고 일상에 스며들고 있다. 다만 메모에 철두철미해졌다. 운전 중에는 녹음을 하고, 노트북으로 일을 하다가는 구글 문서에 메모를 한다.



다섯, 쓰고 싶은 글이 아주 희미하게 보인다.

집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서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했다. 집에 대한 기록을 마무리해야 이 집 짓기가 진실로 끝날 것 같았다. 일주일 정도 후에 작가 등록 알림을 받고 나는 의욕에 차있었다. 집에 들어갈 돈이 곧 집에 대한 철학이 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큰돈 들여서 짓는 집, 이왕이면 나에 대해 더 알고 지으시라고. 따뜻한 말을 건네고 싶었던 건데 어느새 가르치는 어조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어, 이게 아닌데. 내가 무슨 글을 쓰고 싶었더라?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럴 깜냥이 안 되는 건가 생각했다. 그러던 중 이 100일 100장 글쓰기라는 챌린지를 만났다. 백일 동안 집에 대해서는 되도록 적게 쓰고, 편히 읽고 편히 써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오히려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서서히 아주 서서히 본마음이 드러나는 것 같다. 여전히 탐색 중이지만.



여섯, 어떻게든 글은 써진다는 걸 알았다.

내가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나는 결국 죽기 때문이다.

죽음을 알수록 허무주의자가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를 남기고 싶었다. 나의 실체는 사라지겠지만, 나의 정신에서 발골된 텍스트들이라도 매장되거나 화장되지 않고 온라인 세상에서 일정 데이터를 소유하고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앞서 말했지만  발골이 쉽지가 않다. 쓰고 싶은 글은 여전히 미궁이고 끝맺음도 어렵다. 하지만 매일 쓰다 보니 이건 확실하다. 글은 서울로 가려다가 수원에 도착할지언정 쓰인다.  놓는 때를 나만 인정하면 되는 거다.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알았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 표절할 생각말고, 어떻게든 쓰자. 우물쭈물하지 말고. 적어도 100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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