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3

by 이제이



28日






오랜만에 할머니가 모셔져 있는 절에 왔다. 와보지 못한 사이, 위패의 위치들이 바뀌어 있었다. 봉안할 위패가 많아져서 일렬로 세워져 있던 것들이 앞, 뒤 두 줄로 재배치되었다. 위패가 있던 위치를 기억하면서 번호를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리바꿈이 되니 당황스러웠다. 번호를 아는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고, 하는 수 없이 기억을 더듬어 그나마 낯익은 숫자 언저리에서 위패들을 하나씩 읽어내리고 있었다. 한참을 나오지 않아서인지 관리하는 분이 들어와서 도와드릴까요, 하고 묻는다. 내가 반색하며 꺼낸 할머니 성함을 듣더니 종무소에 전화 한 통 넣자마자 자리를 찾아주었다. 나도 참 맹추다. 물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서 이 많은 위패 이름을 하나씩 읽고 있다니.



“아, 3083 영가님.”



할머니는 그들에게 3083, 번호로 불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절에서 돌아가신 분을 뜻하는 ‘영가님’만 뒤에 붙이지 않았다면, 이 네 자리 번호는 할머니의 수용번호 같기도 하고, 방 번호 같기도 했다. 동명이인이 있을 수도 있고, 보다 정확히 하기 위해 번호를 붙인 것임을 아는데도, 번호로 불리는 것은 인간미가 없어 보인다. 할머니는 장년의 대부분을 집이 아닌 방에 사셨다. 자식들과도 같이 안 사셨던 분이 병실에서, 요양원에서 처음 본 사람들과 함께 밤낮을 맞이하고, 화장실을 공동으로 쓰고, 보기 싫은 TV 프로를 보셔야만 했다. 그 방들은 주로 서너 자리의 숫자로 불렸다. 1203호 환자분, 507호 할머님... 그리고 3083 영가님. 할머니는 돌아가시고도 숫자로 불리는 방 이름을 앞에 달고 계신다. 할머니는 어떻게 불리길 바라셨을까? 선생님, 원장님, 박사님, 사장님... 할머니도 꿈이 있었을 텐데.



위패 크기는 신용카드를 세로로 세워둔 정도. 그래도 한 때는 몸 뉘일 방 하나는 가지고 계셨는데, 돌아가신 할머니가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의 전부는 이 위패 하나 세울 자리다. 그마저도 뒷줄에 놓여 조명 빛 마저 시원하게 들지 않는다. 위패들이 빽빽하게 한 벽 가득 채워있는 걸 보니 거대한 아파트 단지 같다. 복도식 아파트, 옆집에 누가 왔다 가는지 조금만 귀 기울이면 알 수 있는 곳. 혹시 나도 지금 주목받는 중일까. 으스스하지만 재밌는 상상이다. 아까 할머니 자리를 찾느라고 읽은 이름들을 기억해낸다. 김 할머니, 박 할아버지.. 간간히 어린아이 같이 예쁜 이름도 보인다.



“우리 할머니, 이 커다란 커뮤니티에서 사회생활 잘하고 계신가.”



할머니 위패 앞에는 담배 한 개비도 올릴 자리가 없다. 그 자리에서 수직으로 내려오는 위치에 들고 온 커피믹스 박스를 내려놓았다. 생전에 당뇨 때문에 고생하신 할머니께 커피 한 잔 타드리면서 잔소리는 한 바가지로 했었다. 이제는 원 없이 드시라고, 그리고 이 많은 이웃님들께 한 잔씩 쏘시라고 큰 박스를 내려놓는다.


이웃님들, 한 잔씩 얻어 드시거든 3083 말고 ‘어이, 강남희 여사! 손녀와서 좋겠어.'라고 고상하게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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