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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Sep 28. 2021

오늘도 극복 중



33日






켜켜이 쌓인 기억의 먼지를 후-하고 불어 소환하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향기. 향기로 기억을 소환한다. ‘마들렌 효과’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유래했다. 주인공 스완의 대서사시적 회상이 과거의 후각 경험을 통해 필연적으로 시작되었다면 나의 과거에는 영영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시간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어릴 적에 지독한 비염을 앓았다. 친할머니는 비염에 붕어탕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매일 아침 붕어탕 국물을  사발씩 먹이곤 하셨다.  느믈느믈하고 비리고, 끈적끈적한 국물을 어차피 냄새도   맡는 코를  손가락으로  붙들어 메고 마셨다. 목구멍이 깔때기인 , 혀도 거치지 않고 바로 목으로 넘어가도록 꿀꺽꿀꺽 삼켰다. 약의 효과는 아주 뒤늦은 사춘기에 나타났다. (할머니의 정성으로 봐서 효과라고 믿고 싶다.) 하여간 나에게는 마들렌 효과를 일으킬 데이터가 많지 않다. 그래서 후각은 그동안 내가 가장 의심을 많이 하는 감각이었다. 분명하게 판단이 서는 다른 감각들에 비해, 이건가 저건가 하고 연상과 판단을 지연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뇌피질에서 정보를 처리하는 시, 청, 촉각과는 다르게 후각정보는 대뇌변연계가 처리한다. 대뇌변연계는 감정을 가공하기 때문에 후각 정보는 냄새를 맡는 당시의 감정, 기억과 연결되어 머리에 새겨진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향기가 과거 회상의 물꼬를 틀 수 있게 하는 기제이다.



후각이 약하다는 점이 큰 지장을 초래한다고 알아차린 건 차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부터이다. 차 애호가에게 있어서 후각이 약하다는 것을 공개하는 것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과 같다. 그만큼 차는 색. 향. 미 3요소 중 향과 맛이 시각적 정보보다 비중이 높다. 넓고 깊은 차의 세계를 분화하여 익히기에 향미를 구별해내는 것은 결정적인 능력이다. 고도의 후각이 필요한 이유는 맛을 느끼는 데에 미각이 고작 20%, 후각이 80%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미각과 후각이 결합되어야 비로소 복합하고 미묘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즉, 후각이 약하면 온전히 그 풍성한 차 맛을 느낄 수가 없다. 나로서는 아는 것만으로도 침울해지는 사실이다. 후각과 연결된 맛에 대한 프로필의 부족, 거기서 오는 감각에 대한 불신으로 차 관능평가 시간이 가장 긴장되고 품평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후각이 콤플렉스가 되어버린 거다.



비염을 일으키는 원인을 찾기 위해 대학병원에서 알레르기 검사도 받았지만 원인은 먼지 진드기 정도만 나올 뿐이었다. 겨울에서 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가 가장 고비다. 마스크 덕에 컨디션이 좋더니 작년 가을 결국 비염이 도졌다. 후각이 거의 마비가 되는 지경에 이르러 다급하게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계절성 비염으로 약 말고는 손쓸 것이 없지만, 후각을 많이 사용하는 일을 하니까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졸지에 후각 테스트를 하게 된 것이다. 분명히 아무 냄새를 맡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런 테스트를 권하는 의사의 저의가 궁금했지만, 별 말없이 테스트에 응했다. 과연 내가 어느 정도인지 시험을 해보고 싶었기도 했다. 두세 번 맡아도 간호사가 제시하는 냄새의 답안을 작성할 수가 없어 울상이 되었다.



“저 이거 괜히 했나 봐요. 정말 모르겠는데.”



간호사가 의사를 만나고 오더니 여러 번 맡아보더라도 어떻게든 답을 내야 한다고 했다. 백지는 거절이다. 간호사는 인내심이 대단했다. 병에 아주 코를 박고 맡고 있는 환자가 안쓰러운지 닦달하지 않고 편하게 하세요, 한다. 분명히 냄새가 맡아지지 않았는데, 머릿속에서 혹시 이건가? 하고 이미지가 떠올랐다. 쥐어짜다시피 하는 수준이었지만 하나둘씩 답안지를 적어내고 다시 의사를 만나는 시간. 나는 사력을 다했는데 결과지는 단 몇 초만에 의사 손에 들려있다.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진짜 냄새 못 맡으시는 거 맞죠?”



나는 1문항을 빼고 모두 맞췄던 것이다. 분명 냄새가 나지 않았는데, 뇌에서 그려주는 대로 답했을 뿐이었다. 여전히 미스터리지만 그날은 내 후각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생각보다 내 코가 괜찮다는 것. 심지어 코에서 느끼지 못했어도 뇌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의사가 권유한 테스트 하나가 나의 가능성에 확신을 준 것이다.



한 달 후 내 생일에 남편에게 100가지 아로마 키트를 사달라고 했다. 후각은 후천적으로 학습이 가능해서 냄새를 맡고, 묘사하고, 연상화하여 구별하는 것을 훈련하다 보면 머릿속 냄새 지도가 정교해진다는데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었다.



아로마 키트에는 아로마 개수대로 100개의 비주얼 인상 카드가 있는데, 각 카드의 앞 면에는 연상 그림과 이름, 카테고리가 적혀있고, 뒷 면에는 개인적으로 느끼는 부분을 적기 위한 메모란이 있다. 역시나 후각이 감정과 심상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드 맨 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What you are smelling now is always right.



콤플렉스는 개인적인 관념이다. 그렇기에 콤플렉스를 만드는 것도 나이고 그것을 깨는 것도 나이다. 오늘도 내가 맞다고 믿으며 후각 콤플렉스를 극복 중이다. 내가 닿을 수 있는 차의 세계가 확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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