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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Sep 26. 2021

접종 주권



31日






“백신 맞았어?”



‘아니’라고 답하기에 주저함이 묻어나는 이유는 반사적으로 왜라는 반문이 따르기 때문이다. 몇 달 전만 해도 안정성을 보장할 수 없다며 맞지 않겠다고 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물으면 나는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어려워진다.

적당히 거리가 있는 사이의 사람에게는 적당히, 최대한 늦게 맞으려고 한다고 대답한다. 그럴 때 훈장 같은 2차 접종 배지를 가진 사람들 일부는 눈에 불편함이 내려앉는다. 불편함이 서린 그 눈들이 나는 불편하다. 그 눈빛의 기저에는 어떤 심리가 있는 걸까. 백신을 맞지 않았다고 해서 바이러스의 숙주가 되는 건 아닌데.



백신을 맞을 이유는 뉴스 몇 줄로 정당화하고, 백신을 맞지 않을 이유는 몇 줄로는 인정받을 수 없는 걸까. 얼마 전 응급의학과 의사가 이타적이기 위해 백신을 맞으라는 이야기 하는 걸 들었다. 자신도 맞기 싫었는데 가족을 위해서 맞았다고 했다. 확률적으로 아주 안전하다고도 덧붙였다. 나는 의사의 말에서 구시대의 공리주의를 보았다. 사람 생명을 나타낸 확률이 소수점 이하로 표기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숫자일 뿐이다. 아는 분의 가족이, 친구가 백신 접종 후 돌아가셨다. 두 분의 나이는 중년과 노년. 기저질환은 없었다. 나라에서 백신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는지 모르겠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두 사람이 더 이상 사랑하는 가족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에서는 한 명의 국민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세상의 전부였던 사람들이다. 어떤 확률도 나에게 적용되었을 때는 오직  사는 것과 죽는 것. 0과 1 이진법일 뿐이다.



백신 인센티브와 페널티 이슈를 보면서 백신 접종 주권에 있어서 우리는 충분히 민주적인가 의문이 들었다. 남편은 일의 특성상 PCR을 15번 정도 받았다. 백신을 접종한다고 해도 감염은 가능하니 검사는 받아야 한다. 도대체 그럴 거면 백신은 왜 맞으라고 시켜?했더니 앞으로 해외 촬영에 영향이 갈 것이라고 했다. 먹고사는 기본권에 제약이 오더라도 남편이 맞지 않겠다고 결정하면 나는 의견을 존중할 것이다. 그도 나에게 그럴 것이므로.



주변의 경험담과 확률에 숨겨진 의미로도 백신을 맞지 않을 이유를 인정받을  없을 것이다. 0 1 갈림길에서 접종 주권이 위협받고 있다. 불편한 시선이 나를 잡아 끈다. 자신들이 괜찮았으니 ‘설마너한테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고 응원한다. 따뜻한 무책임함이란 이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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