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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Sep 25. 2021

멍이 늘면서 시작한 것



30






나는 결혼 전까지 진정한 휴식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쉬는 날에도 밀린 청소, 독서나 공부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면서 과열된 일과를 소화해내거나 아예 바닥에 누룽지처럼 눌어붙어 밀린 드라마와 물아일체가 되는 나태한 시간을 보냈다. 휴식이 생산성을 키우기 위해 충전을 한다는 의미라면 어느 쪽도 해당이 되지 않는 극단적인 방법들이었다. 일상에서 받은 부정적 에너지를 회복하는 메커니즘에 이해도가 떨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피로했다.



당시의 나는 ‘카이젠’이라는 개념에 집착하고 있었다. 개선을 일본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경영학에서 일본 기업들의 강점으로 꼽히는 부분이다. 지속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뒤에 남겨질 부정적인 것들은 알아서 사라지거나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불편한 것들은 전환시키거나 소화시키지 못하면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 의해 내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납작 엎드려 있을 뿐 결국은 그대로이다. 거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집의 바닥을 떠받치는 기둥을 갉아먹는 흰개미처럼 나를 점점 속 빈 강정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강정이 내 몸이라면 마음, 정신, 영혼 이것들은 강정 속이다. 나는 몸만 현재에 있되 마음 등은 미래와 과거에 머물러있었다. 카이젠을 위한 설계 혹은 카이젠을 위한 반성. 머릿속이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은 이 둘이었다. ‘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는 당시의 나를 아주 적절하게 그리는 표현이었다. 생각이 꽉꽉 들어차, 몸과 머리가 따로 놀았다.



어느 날, 샤워를 하고 바디로션을 바르는데 그간 알아차리지 못했던 멍들이 보였다. 나는 어딘가에 툭툭 잘 부딪혔다. 오른손으로 물건을 들고 방으로 들어갈 때 왼팔이 뒤늦게 따라오다 문틀에 부딪혔고, 계단 오르기 위해 복도에서 코너를 도는데 눈으로만 돌려고 하니, 몸이 필요한 각도보다 더 작은 각도로 몸을 꺾어 어깨나 무릎이 어김없이 계단 손스침에 부딪혔다. 몸이라는 배 하나 운전도 못하는 우둔함. 꽤나 아팠을 텐데 아야-하고 나면 잊어버리고 또 하던 일을 했던 미련스러움. 세어보니 얼마 전 생긴 멍들, 사라져 가는 멍들.. 이 꽤나 많았다. 내가 ‘정신없이’ 살고 있구나. 잠시 생각했다.



내가 생각이 유독 많다는 것을 아는 오랜 친구가 명상을 해보면 어떠냐고 했다.



“명상이면,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는 건가?”



나는 명상을 또 다른 지적 활동인 사색 정도로 생각했다. 명상에 대한 이해는 걸음도 못 뗀 수준이었다. 친구는 생각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마음을,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움에 더 가깝다고도 했다. 생각을 비운다라. 나는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세요, 하면 그때부터 코끼리 집단을 상상하는 사람인데. 꿈에서조차 바쁜 나에게 비우는 것이 가능한가.



그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도, 내 몸에 멍이라는 이상은 감지하지 못한 ‘나’는 내 몸의 주인이 맞나? 몸에 깃든 내 생각은, 내 마음은 무얼 위해서 존재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의 휴식과 나의 개선도 결국은 지금 이 몸의 주인으로 되도록 오래, 건강히, 잘 살기 위한 것들 아닌가. 인간은 망각의 동물. 나는 암덩이를 떼어내던 과거를 반추하고, 재발의 두려움을 상상할 뿐, 또다시 꽤 괜찮은 현재의 나로 사는 것에 너무 소홀했다.



퍼런 무릎의 멍이 누렇게 변해갈 때쯤 명상을 시작했다. 나의 명상은 어렵지 않다. 명상을 위한  단계는 뭐든지 극단적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일과에는 여백을 둔다. 속도를 늦추어도 지장이 없도록. 관성의 법칙을 이해하고 너무 수동적으로만 휴식을 취하지도 않는다.  시간 영상을 보았다면 잠시라도 바깥 활동을 한다.  일련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생각을 지금으로 끌어오는 . 부정의 에너지를 인정하는 . 그리고 지금 나의 몸과 마음을 주인으로 존재함을 감사하는 . 이것이 회복의 메커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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