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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Oct 03. 2021

‘하나’로부터

합평회 1.



38日






모든 것은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변화에 대한 절박함. 이 것이 아니었다면 합평회에 모인 작가들은 40일 동안 매일 글을 발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아닌 척을 하고 싶었다. 새벽 차 마시는 시간에 슬쩍 글쓰기를 끼워두었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낮에도, 밤에도 글을 쓰고 있었다. 글에 대한 생각이 종일 떠나지가 않았다. 인풋만 하던 일상에 변화를 일으키고 싶었다.



나는 합평회合評會라는 단어가 불편했다. 검색해보니 합동평가회의 줄임말 같았다. 합동으로 평가를 한다고. 수십 개의 눈이 글을 낭독하는 나에게 꽂혀있는 상상을 하니 뒷골이 쭈뼛했다. 자동차 라이트와 눈이 마주친 길고양이가 그 자리에 얼어붙는 것처럼, 나는 마주치는 눈동자에 할 말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후에 소개 시간에 한 작가님이 전날 코로나에 걸려서 못 간다고 말할까, 고민했다고 했다. 뜨끔했다. 나도 똑같은 고민을 했으니까. 백신 안 맞은 걸 불편해할 분이 계실까 봐 이틀 전에 PCR을 받았다. 갈 거냐고 묻는 작가님에게 그럼요, 하고 안 갈 여지 따위는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전날 밤까지 갈까 말까를 줄다리기했다. 그래도 결국 오게 된 건 ‘가시죠?’라는 그 하나의 물음 때문이었다.



검정에 가까운 짙은 회색, 모던한 직선의 외벽 사이에 애매하게 볼록 튀어나온 테라스가 눈에 띄는 건물 앞에 섰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은 지 얼마 안돼 보이지만 내부에는 도끼다시 바닥이 깔린 오래된 건물이었다. 구석구석 보아도 찌든 먼지가 없는 반짝이는 계단이, 레드카펫은 없지만 환영하기 위해 잘 닦아놓은 길처럼 보였다.



오전 7시, 합평회를 여는 책과강연의 사무실은 오후 7시의 분위기였다. 약간 낮은 조도에 눈 조리개가 커졌다. 빨간 캐비닛, 점멸하는 전구, 흘러나오는 음악.. 앞에 세워 이야기를 시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어떻게든 되겠다, 싶었다.



자리에 모인 작가들은 조심스러웠다. 조심스레 인사를 나누고, 조심스레 마들렌을 건네고, 다리가 부딪히면 미안하다 수줍게 웃고, 자기 물건들이 본인 이름이 적힌 위치를 넘어 흩어지지 않도록 공간을 관리했다. 그것만으로도 좋은 사람들인 걸 알 수 있었다.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도 좋은 사람이 된다. 좋은 사람들에게 나도 꾸미지 않은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애써 어색하지 않은 척, 부러 강한 척하지 않았다. 나는 마음껏 수줍어하고, 어수룩할 수 있었다. 비밀친구들을 만든 것 같았다. 동기들은 내 대신 티슈를 뽑아주고, 마이크를 건네주고, 뒤죽박죽 되어 버린 원고 사이에서 내가 읽을 원고를 찾아주었다. 그래, 변화의 절박함은 글쓰기를 시작하게 했지만 40일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하나의 손길 때문이었구나. 좋아요를 눌러주는 손, 매일 남겨지는 댓글 하나. 그런 것들이 나를 또다시 노트북 앞에 앉게 했구나.



모여서 평가한다는 합평合評을 비로소 내 식대로 이해했다. 바둑판 평枰. 합평合枰. 글쓰기의 수를 함께 놓고 읽을, 편들을 만드는 시간.



내 차례가 왔다. 마이크를 잡고 호흡을 한 번 했다. ‘아이가-’ 하고 운을 떼는 순간 마음속 땅에서 톡-하고 싹이 하나 올라왔다. 단단한 지면을 뚫고, 함께라면 할 수 있다는 하나의 확신이,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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