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이 Oct 18. 2021

선비 책상



집에서 제일 크고 밝은 방이 할머니의 방이었던 어린 시절, 학교를 마치고 오면 보물창고 같은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 탐험을 했다. 할머니의 검은 자개장은 안쪽이 어두워서 안에 무엇이 있는지 촉감으로 추리해내는 재미가 있었다. 잡아 꺼내면 눈물 모양의 옥 단추가 달린 빨간 양단 마고자, 한지에 쌓인 노리개, 포마드 냄새가 나는 할아버지 손수건 등 오래된 물건들이 달려 나왔다. 장롱에서 사촌들과 숨바꼭질을 하다 보면 꼭 마지막에 내 눈길이 닿는 곳은 경상이라고 불리는 선비 책상이었다. 할머니 방의 물건 중 가장 소박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ㄷ자로 이어진 번쩍이는 자개장 곁에 놓인 자그마한 책상에는 어느 날은 경대가, 어느 날은 할머니의 성경책이 올려져 있었다. 지금보다 체구가 작았을 옛날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작은 나무 책상은 당시에 어린 내가 쓰기에도 흠없이 잘 맞아서 정좌를 하고 두 팔을 올려 자세를 잡아보곤 했다. 선비 마냥 공부라도 할 기세로.



어느 날 다실을 정리하다가 문득, 이 경상이 친정집 중층 계단에 수 십 년 동안 외로이 놓여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늙고 낡은 것이라 괄시를 받던 책상이 그제야 생각이 났다. 오래도록 보금자리가 될 ‘작은 기윤재’를 마련하고 보니, 아마도 나의 뿌리와 가장 가까운 물건을 놓아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깊이가 있는 물건이 이 공간의 중심을 잡아주길 바라고 있었다. 선비 책상은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우리 집안에서 시간의 깊이가 가장 깊은 물건이었다.



엄마는 주말께 오셔서 딸이 대를 이어 사용할 책상을 베이비오일로 정성스레 닦아주셨다. 물고기 잠금쇠와 금속 장식은 없어졌지만, 세월의 때를 벗겨내니 멋진 찻상이 되었다. 엄마는 이윽고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며 좋아하셨다.



할머니가 쓰시던 낡은 고재 책상으로 옛 주인들의 역사를 짐작해본다. 책상은 여전히 작지만 오래된 것이 가진 힘은 작지 않다. 세월이 쌓인 묵직함은 내면을 든든하게 한다. 옛 주인들도 이 책상 앞에 앉아서 턱을 괴고 내 나이에 비슷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길을 도모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미치면 내가 지금 고민하는 문제들은 별스럽지 않아 진다. 답은 언제나 있어왔다고 생각하면 관계의 풍파에도 견딜 수 있다. 늙고 낡은 책상이 별처럼 한 자리에 오래 있어주면 좋겠다. 오늘같이.




매거진의 이전글 쓰임과 버림을 고민하는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