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지만 먼 관계의 묘미에 대하여
대학원에서는 인간관계로 고민할 일이 없었다. 늘 주변에 유학생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같은 처지의 외국인들끼리 모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며 끈끈한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가고 나서는 달랐다. 동기들과 선배, 상사와는 어떻게 관계를 맺으면 좋을까? 그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처음으로 진짜 일본인들만 있는 집단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는 새로운 고민거리였다.
특히 어렵게 느껴진 것은 일본인들 특유의 거리감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친하더라도 일정 선 이상은 넘지 않는 일본인들. 한국인은 그 선을 거리낌 없이 마구 넘어다니기 때문에 가끔 상처받거나 당황스럽기도 한데, 일본인들은 그 선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으니 어떻게 친해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거리감이 명확하게 보였던 건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나누는 대화에서였다. 대부분 일 얘기가 아니면 뉴스 토픽, 아니면 주말에 본인들이 뭘 하고 지냈는지에 대한 일상의 시시콜콜한 얘기가 전부였다. “요즘 골프를 시작했는데 말이야", "이번에 유명인 OO가 이혼했다지?" 같은 식으로. 그나마 회식 때 좀 더 깊은 얘기가 나오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일 관련이라 그 사람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누가 언제 결혼했는지, 가족은 어떤지 같은 이야기는 스스로 먼저 꺼내지 않는 이상 알기 어려웠다.
일본은 개인정보에 대해 참 민감한 사회다.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어플이 아닌 서류나 팩스로만 처리해야 하는 게 얼마나 많은지 답답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집 현관을 열면 복도가 먼저 보이고 안에 방이 안 보이게 해놓았겠는가. 현관 문을 열자마자 거실이 보이는 한국 아파트와는 달리, 일본은 현관에서 복도를 거쳐야 비로소 생활공간이 나타난다. 개인의 삶을 보이지 않게 하는 구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개개인의 삶은 참 다채로웠다. 누구에게나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본인만의 삶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았다. 주변에 물어보면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 참 드물었다. 골프, 축구와 같은 스포츠에서부터 요리 학원 선생님, 취업 멘토, 야구부 매니저, 부케 만들기, LP 수집까지. 참 다양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한국에서 많은 직장인들이 입을 모아 "운동이나 독서가 취미"라고 천편일률적으로 말하는 것과는 달랐다. 부러울 정도로.
가깝지만 먼 그 적절한 거리감이 있어 외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참 편했다. 서로의 영역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관계는 성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누군가가 내 사생활을 캐묻지도 않고, 나 역시 상대방의 개인적인 일에 지나치게 관여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취약성을 드러내고, 진심을 다하는 관계를 만들기 어려운 탓에 찾아오는 깊은 외로움은 문제이긴 했다. 때로 누군가에게 진짜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어도 그런 관계를 만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다.
결국 나라별로 관계성이 다른 걸 어떡하겠는가. 한국식 관계에 익숙했던 나에게 이는 또 새로운 배움이었다. 거리감 있는 관계가 서먹하고 차갑게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나름의 장점도 보이기 시작했다. 서로를 존중하되 깊이 파고들지 않는, 그 절묘한 균형감 말이다. 그렇게 새로운 관계성 속에서 문화적 관용성을 배워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