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무뎌지는 순간들
미팅에 지각할까봐 헐레벌떡 집을 나선 어느 날 아침. 츠루미역에 도착하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직감했다. 평소보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승강장은 물론이고, 역으로 이어지는 계단에까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 설마..."
스마트폰을 꺼내 환승 앱을 확인해보니 역시나 그 글자가 떠 있었다.
'인신사고'.
한국에서는 잘 겪기 어렵지만 일본에서는 비일비재로 겪게 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인신사고다. 서울 지하철도 충분히 복잡하지만, 도쿄는 지하철만으로도 13개 노선에다가, 여기에 JR선과 각종 사철까지 더해지면 수십 개의 노선이 얽히고 설켜 있어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철도망을 자랑한다. 그러니 어디선가는 매일 뭔가 일어날 수밖에.
실제로 일본 국토교통성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05년부터 2014년까지 10년간 도쿄·사이타마·가나가와 등 수도권 15개 노선에서 3,145건의 인신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연간 300여 건 중 60%가 자살, 나머지는 플랫폼 추락이나 무단 침입 같은 사고들이었다고.
처음에 인신사고를 인지했을 때, 마음이 철렁했던 걸 기억한다. '인신사고'라는 단어가 뭘 의미하는지 몰랐던 건 아니었지만, 막상 그 상황에 직면하니 생각보다 충격이 컸다. 누군가가 자살을 했을 수도 있다니. 대체 어떤 이유가 있어서? 얼마나 삶이 힘들었기에?
그런데 나중에 일본인 동기들에게 들은 얘기가 더 가슴 아팠다. 이렇게 자살을 하게 되면 철도 회사가 유가족들에게 수백만 엔에서 천만 엔까지의 금액을 배상 청구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철도회사와 유가족 간 협의를 통해 금액이 조정되기도 하고, 유가족이 상속 포기를 통해 배상 책임을 회피할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슬픔에 잠겨있을 가족들에게 그런 청구서까지 날아간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고 보니 2014년 이슬람 국가에 일본인들이 납치되었을 때 그들 중 한 명의 어머니가 TV에 나와 "민폐를 끼쳐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한국이라면? 아들이 납치되었으니 정부 보고 뭐 하냐고, 빨리 구해내라고 시위를 했을 거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사과를 한다. 납치로 인한 사회적 부담에 대해 유가족이 책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전철 사고도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생의 마지막 장소를 전철역으로 선택한 개인의 슬픈 비극보다는, 출근길에 많은 사람에게 누를 끼친 '민폐'가 되어버리는 거였다.
이렇듯 일본 사회에서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매우 큰 죄의식으로 여겨진다. 어릴 때부터 일본인들은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배우며 자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왜 이들은 남들에게 가장 큰 폐를 끼치는 방식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걸까? 폐를 끼치지 말라는 말은 결국 문제를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압박이 되기도 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조차 ‘폐'라고 여기게 만든다. 인신사고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얼마나 ‘폐를 끼치는 존재'인지 세상에 자신을 각인시키는 방식이 되고 말았다.
더 씁쓸했던 건 인신사고를 몇 번 겪으며 이제는 그 단어에 더 이상 가슴이 철렁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또 지각하는 거 아니야?"
"이번엔 몇 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거야?"
"엄청 붐비겠네."
나도 모르게 사고를 개인의 비극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런 내 자신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씁쓸함이 느껴지던지. 역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짜증스러워하거나 한숨을 쉬는 사람들은 있어도,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본에서 지진만큼이나 피하고 싶은 존재가 바로 인신사고라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인신사고가 발생하면 보통 1시간에서 2시간 이상은 발목이 잡혔으니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개인의 아픔보다는 내 일정이 우선시되어버렸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느끼는 것이지만, 아무리 바쁘고 정신없는 현대 사회에서도 개인의 비극에 대해서 적어도 마음이 쓰이고 함께 그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것이 일말의 시민의 양심이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언젠가 다시 '인신사고'라는 단어를 마주했을 때, 스케줄 걱정보다는 먼저 그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내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폐를 끼친다'고 느끼지 않도록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결국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따뜻함일 수도 있다. 그 사이에서 어떤 사람이 될지는 결국 우리 스스로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